공항에 마중나온 근삼이가 저를 끌고 제일 먼저 간 곳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생가.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피곤도 풀리기전에 제일 먼저 갔던 곳이죠.
근삼이가 워싱턴에 왔으니 워싱턴 생가를 봐야한다--;; 면서 데려간 곳이다.

워싱턴 DC 남쪽 약 24km 지점에 있고 18세기 미국 남부 농장 소유자의 전형적인 저택양식이라네요.
택 내부에는 워싱턴이 임종할 당시의 침대와 가구를 비롯해
렘브란트가 그린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등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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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바로 조지 워싱턴의 생가 건물입니다.
총 3채의 건물이 이어져있는데 가운데 제일 큰 주택이죠.

조지 워싱턴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죠.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좀더 자세하게 검색을 해보면,
미국의 정치가.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헌법제정회의에서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 권한을 강화하였다.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과 헌법의 실현 등에 힘써
신생 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버지니아주 출생.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되었다.
1752년 이복형이 죽자 광대한 마운트버넌의 토지와 버지니아 민병대(民兵隊)의
부대장직을 이어받고 1754년 7년전쟁, 즉 프렌치인디언전쟁에 참가하였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때문이었다.
그후 본국과 식민지와의 항쟁이 일어나자 서부의 토지문제를 놓고 본국의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버지니아의회 의원으로서 1765년 P.헨리를 지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반대를 관철시켰으며,
1769년 타운센드법을 반대하다 의회가 해산당하게 되자 영국상품 불매동맹을 결성하였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합회의가 무력하여 미국의 독립이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자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의장직을 맡아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에 노력하고, 헌법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는 한편,
여러 나라와의 국교를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정견을 달리한 A.해밀턴과 T.제퍼슨을 각각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국내 재정정책의 수립과 외교정책의 정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해밀턴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하였다.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하였다.
신생(新生) 미국의 기반을 굳게 다진 데 대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단한 인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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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생가 뒤쪽 넓은 뜰 앞으로 포토맥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죠.
제 개인적으로도 조지 워싱턴의 생가라는 역사적 의미보다는
그 주택이 있는 환경이 참 좋더군요.
강과 넓디넓은 잔디밭. 그리고 울창한 나무들...

미국 동부를 흐르는 포토맥강은 버지니아주의 하이타운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페어팩스스톤
이 두 곳에서 발원해서 애팔래치아의 산과 계곡, 남북전쟁터, 수도 워싱턴 D.C 등을 거쳐
메릴랜드의 포인트룩아웃에서 대서양의 체서피크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랍니다.
전체 길이가 665km애 이르지요.

포토맥강은 특히
미국 역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바로 이곳 마운트버넌에서 태어나
강을 탐사하며 일생을 보냈곳이고 남북전쟁의 접전지이기도 했습니다.
노예제도보다 버지니아에 충성한 리(Robert E. Lee) 장군이 남군을 이끌고
포토맥강을 두 번 도하했지만 모두 패배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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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뜰에서는 많은 관광객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며 즐거워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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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생가 중앙 건물과 우측 건물을 연결하는 작은 회랑입니다.
회랑보다 늘 그늘을 만들어주는 큰 나무 밑에 휴식처로 최고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 큰 나무는 아래에 보시면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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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이 보시는 이 사진속 어딘가에 앉아서 한참 쉬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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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나무. 그 크기만큼이나 큰 그늘을 만들어주며 사람들이 쉬어갈수 있던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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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건물앞에 너무나도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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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건물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하필 건물의 일부를 보수중이여서 사진이 좀 흉하군요;;;
조지 워싱턴은 바로 이 집에서 1747년부터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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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시작(?) 좌측건물입니다.
생가안을 둘러볼려면 여기서부터 줄을 서서 죽 기다려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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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
안에 주방을 비롯해 창고 등이 있었던 기억이...

이제 조지 워싱턴의 무덤으로 한번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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