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3일이면 온 친척이 고향에 모인다.
산좋고 물좋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비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곳에 갈 때는 무려 12시간이 걸렸지만...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에는 6시간이면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다.
(요즘 같은 때에 6시간이라면 아직도 먼 거리이긴 하지만...)

올해는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 다녀왔다.
고향에 처음 디카를 들고간지라 이곳저곳 사진을 많이 찍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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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입구에 있는 쉼터
큰 가로수가 사시사철 그늘을 만들어준다.
동네 어르신들이 그 아래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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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안쪽에는 큰 대리석에 마을의 향약이 적혀있다.
이제는 시골 마을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국사책에서나 배우고 보지 못하는 것이 될라나?

향약 []  :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주체 ·규모 ·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립약조(鄕立約條) ·향헌(鄕憲) ·면약(面約)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규(洞規) ·촌약(村約) ·촌계(村契) ·이약(里約) ·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 ·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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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당숙어른이 3년전 낙향하여 기거하시는 집.
원래 부산에 계셨는데 숙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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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어른 집 앞의 채소와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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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당숙어른 집에서 20분쯤 걸어가면 된다.
올해부터는 포장도로를 둬서 차를 가지고 올라가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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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왼쪽이 할아버지. 오른쪽이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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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이는 것이 최근에 돌아가신 큰 아버지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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