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스크린레포츠] 역대 최고의 스포츠영화들(기사입력 2004-06-01 18:06)

오늘은 <심산의 스크린레포츠>가 연재되기 시작한 지 정확히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그 동안 스포츠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영화들을 꼭 50편 소개했다. 내가 이 연재를 위하여 다시 보거나 새로 구입한 작품들이 대략 200편 정도 되니 그 전체의 4분의 1 정도만을 추려낸 셈이다. 스포츠영화라고 이름붙일 만한 작품들이 200편씩이나 되느냐고 그보다 훨씬 더 많다. 1997년에 이탈리아 산악회에서 펴낸 <산악영화 포스터집>을 보면 등반과 스키를 다룬 작품들의 수효만도 200편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옛어른들 말씀에도 철철 넘치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란 듯 한 것이 낫다고 했다. <심산의 스크린레포츠>는 오늘로서 연재를 마감한다.

첫째, 너무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재론하는 것은 새삼스럽고,
둘째,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은 호사가 취미에 불과하며,
셋째, 구해볼 수는 있으나 (예술)작품으로서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들은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일간지 특유의 대중성을 염두에 둘 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전문성의 미명 아래 지나치게 파편화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별에는 아쉬움이 따른다. 막상 연재를 접으려니 그 동안 뒤로 미뤄놨다가 결국 거론하지 못한 작품들이 무언의 항변이라도 하는 것 같아 귀가 간지럽다. 특히,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다큐멘터리 형식에 담은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1938년)를 다루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최고의 스포츠영화인 동시에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동시에 '나치 부역 정치영화'라는 낙인까지 찍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스포츠와 영화 그리고 정치를 논할 때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못 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면 한이 없다.

대신 2001년에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스포츠영화 20선'을 소개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려 한다. 이들 중 그 동안 연재에서 다룬 작품들은 모두 10편이다.

로버트 로센의 <허슬러>(당구, 1961년),
테드 코체프의 <달라스의 투혼>(미식축구, 1979년),
피터 예이츠의 <브레이킹 어웨이>(싸이클, 1979년),
마틴 스코시즈의 <성난 황소>(복싱, 1980년),
휴 허드슨의 <불의 전차>(육상, 1981년),
배리 레빈슨의 <내츄럴>(야구, 1984),
데이비드 앤스포의 <후지어>(농구, 1986년),
론 셸튼의 <19번째 남자>(야구, 1988년),
필 앨든 로빈슨의 <꿈의 구장>(야구, 1989년),
캐머론 크로의 <제리 맥과이어>(미식축구, 1996년).

연재에서 다루지 못한 나머지 10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로버트 로센의 <육체와 영혼>(복싱, 1947년),
로버트 와이즈의 <셋업>(복싱, 1949년),
마크 롭슨의 <하더 데이 폴>(복싱, 1956년),
스탠리 도넌의 <댐 양키즈>(야구, 1958년),
랄프 넬슨의 <헤비급을 위한 진혼곡>(복싱-레슬링, 1962년),
존 휴스턴의 <팻 시티>(복싱, 1972년),
존 헨콕의 <대야망>(야구, 1973년),
존 아빌드슨의 <록키>(복싱, 1976년),
마이클 리치의 <꼴찌 야구단>(야구, 1976년),
조지 로이힐의 <슬랩샷>(아이스하키, 1977년).

이들 중 몇몇은 뜻밖에도 국내에 출시되어 있으니 열혈 스포츠영화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구해보시기 바란다.

스포츠만큼 영화적인 인간 활동은 없다. 동시에 스포츠만큼 영화에 담기에 버거운 인간 활동도 없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서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키지만 어떤 뜻에서 ‘너무도 빤한 플롯’을 비켜갈 수가 없는 까닭이다. 잘 만든 스포츠영화는 그래서 귀하고 그래서 더욱 더 감동적이다. 이제 우리 나라는 스포츠강국인 동시에 영화강국이다. 이제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스포츠영화를 만들어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 동안 이 연재에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독자분들 앞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린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 인투 씬 에어(기사입력 2004-05-25 17:34)

2004년 5월18일,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등반대장 박무택과 대원 장민은 세계의 지붕 끝에 우뚝 섰다. 대구 계명대학교 산악부 출신들이 모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고자 성취해낸 쾌거였다. 하지만 이날 오후 이들은 무전기를 통하여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탈진과 설맹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다는 것이다. 셸파들마저 포기한 상황에서 홀로 그들을 구조하러 올라간 백준호 대원마저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사흘 뒤의 일이다.

도대체 하늘과 맞닿은 저 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해발 8천미터에 오르면 공기 중의 산소 농도가 평지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 '희박한 공기'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극한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마련이다. 산악인들은 그래서 이 특수한 시공간을 ‘죽음의 지대’라고 부른다.

이곳은 곧잘 인간의 의지와 이성의 통제를 무력화시키곤 한다. 산악문학으로는 드물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바로 이 죽음의 지대에서 펼쳐지는 비극적인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으로 유명하다.

96년 5월 10일, 에베레스트 죽음의 지대에서는 무려 18명이 조난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사고 당일 정상에 올랐던 산악인 겸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증언하는 그들의 최후는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버거울 만큼 고통스럽다. 동시에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기적처럼 피어나는 뜨거운 인간애의 편린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지만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던 이 책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추구해야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디브이디(DVD)로 출시되어 있는 로버트 마르코비치 감독의 <인투 씬 에어>(1997년)는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다.
할리우드식 산악영화들 속에는 결핍되어 있는 '고통스럽지만 우직한 진실'이 이 작품 속에는 있다. 박대장의 조난소식을 듣고 한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불현듯 이 작품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홀린 듯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떠나가 버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 산악인 박무택 백준호 장민! 부디 편히 눈을 감고 극락왕생하시라!


낙오자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 리플레이스먼트(기사입력 2004-05-18 17:48)

워싱턴 센티널즈 소속 선수들은 그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처우개선에 대한 요구가 먹혀들지 않자, 미국 프로풋볼리그(NFL)가 플레이오프에 돌입하기 직전에 파업을 선언해버린다. 벼랑 끝으로 몰린 구단주는 전설적인 코치 지미(진 핵크먼)를 불러들여 '대체선수(리플레이스먼트)'들을 급조해서라도 시합에 출전해달라고 애원한다. 순간 지미의 뇌리에 떠오른 사람은 놀라운 재능을 갖추었으나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여 구장을 떠나야 했던 ‘잊혀진 쿼터백’ 셰인(키아누 리브스)이었다.

하워드 도이치 감독의 <리플레이스먼트>(2000년)는 파업에 돌입한 정식선수들을 대신하여 구장에 투입된 낙오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정통 미식축구영화다. 이 작품의 최대 강점은 그야말로 백화제방하듯 제각각 살아 숨쉬는 다양한 조연급 캐릭터들의 놀라운 조화에 있다. 그들 모두는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 하나같이 사회의 낙오자들이었다. 살인죄로 복역중인 죄수, 과격한 성격 때문에 늘 일을 그르치는 경찰, 비대한 몸집의 스모선수, 그라운드 안에서도 담배를 피워대는 꼴초…그들의 팀플레이가 불협화음의 극치가 되고 본의 아닌 코미디가 되어버리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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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레이스먼트>는 얄미울만큼 '웰메이드'되어 있는 할리우드 영화다. 잘 짜여진 플롯 속에서 코미디는 어느 새 휴먼드라마로 바뀌고 전문성은 대중성을 쉽게 획득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노동조합의 정식파업에 저런 식으로 엿을 먹여도 되는 거야"하는 따위의 '입 바른'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다. <양들의 침묵>, <식스센스>의 세계적인 촬영감독 후지모토 타크의 카메라는 빤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영화의 앵글을 자유자재로 비틀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화면 위로 깔리는 '정겨운 옛노래'들은 저항 없는 감정이입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록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이 세상의 모든 낙오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지미가 셰인에게 묻는다.

"승자와 패자는 뭐가 다르지"
"점수가 다르죠."
"아닐세, 진정한 승자란 재기에 도전할 용기를 갖는 자일세."

정식선수들과 패싸움을 벌인 후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리플레이스먼트'들이 경쾌한 디스코 풍의 노래 <아이 윌 서바이브>를 불러제끼며 신나게 춤추던 장면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죽음을 부르는 산 : 버티컬 리미트(기사입력 2004-05-11 17:22)

금년은 K2 초등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작년에 세계적인 열기 속에 치뤄졌던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 기념식과 비교해보면 일반인들의 관심은 지극히 낮다. 해외에서는 초등의 당사자인 이탈리아산악회의 조촐한 기념식이 있었을 뿐이고, 국내에서는 8천미터 14좌를 모두 완등한 한왕용이 K2 베이스캠프 청소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발고도가 곧 등반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최고봉은 에베레스트이지만 산악인들의 최고봉은 K2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험준하며 상시적인 악천후에 휩싸여 있어 등반이 극히 까다로운 산이 바로 K2다. 현지인들은 이 산을 '하늘의 절대군주', 산악인들은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 부른다. 이 하늘의 절대군주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카라코람 산맥의 중앙 깊숙이 숨어 있어, 그를 힐끗 알현하기만 하려 해도 목숨을 건 대장정을 감행해야 한다.

마틴 캠벨 감독의 <버티컬 리미트>(2000년)는 신이 지상에 세워놓은 이 위대한 조각품을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드라마는 빈약하고 스토리의 사실성 역시 현저히 떨어지지만 스펙터클만은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든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에 해당하는 거벽등반 조난장면은 그 아찔한 현장감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산악영화로서는 드물게 세계적인 블록버스터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첨단영화기법 덕분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영화인이기 이전에 산악인쯤으로 여기는 나 같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현란한 영화기법들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할리우드가 ‘산악인들만의 숨겨진 성지’마저 그럴싸한 액션과 선정주의로 포장하여 시장에서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영화 속에 넘쳐나는 그 숱한 죽음들에 제대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K2가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면, 할리우드는 죽음을 팔아먹는 악질상인인 것이다. 이 작품속에서 그나마 산악인에 가장 가깝게 묘사되고 있는 캐릭터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고 의문의 조난사고로 아내마저 잃은 베테랑급 고산등반가 몽고메리(스코트 글렌)다. 그는 스스로 자일을 잘라 영화 속의 악인과 함께 죽어가며 나직하게 진언을 외운다. "옴 마니 반메훔!"


돌연변이 스포츠 에이전트의 꿈 : 제리 맥과이어(기사입력 2004-05-04 17:48 )

연예인의 뒤에 매니지먼트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로스포츠 선수 역시 본질적으로 연예인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들의 뒤에도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프로선수의 매니지먼트 회사를 스포츠 에이전시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계기로 뒤늦게 알려진 낯선 존재들이지만, 실상 이들이 프로스포츠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하다.

스포츠 에이전트는 한 선수를 죽이고 살린다. 스타를 만드는 것도 그들이고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을 따내는 것도 그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한 구단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이윤의 극대화만이 이들이 신봉하는 유일한 가치다. 제대로 된 스포츠 에이전트라면 적어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돈을 위해서라면 거짓도 서슴치 않는 비즈니스 풍토에 신물이 나!"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인간관계야."

카메론 크로우가 각본·감독·제작을 겸한 <제리 맥과이어>(1996년)는 제 본분(?)을 잊은 돌연변이 스포츠 에이전트에 관한 영화다. 거대 스포츠 에이전시에서도 수석 에이전트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제리(톰 크루즈)가 갑작스럽게 해고통보를 받은 것은 그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 때문이었다. 프로의 세계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가 도대체 자본주의적 계약관계 안에서 인간미를 찾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제리는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당연히 해고당한다. 그의 아름다우나 어리석은 꿈에 기꺼이 동참을 선언하며 함께 사표를 던진 사람은 같은 직장의 여성동료 도로시(르네 젤위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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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맥과이어>는 프로스포츠계의 이면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며 우리가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울타리 안에서는 폄하되고 조롱받는 사회주의적 이상에 대한 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순진한 믿음만을 찬양하진 않는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제리의 유일한 고객이 된 천방지축 미식축구선수 로드(쿠바 쿠딩 주니어)가 바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오직 ‘돈’ 뿐이었던 것이다. 로드가 노상 입에 달고 사는 “쇼우 미 더 머니!”는 이 영화가 남긴 가장 익살맞은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감독의 빼어난 균형감각이 제리의 아름다운 꿈 못지 않게 로드의 솔직한 욕망 역시 밉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꿈을 되찾는 마법의 공간 : 꿈의 구장(기사입력 2004-04-27 18:28)

아이오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농부 레이(케빈 코스트너)는 어느 날 자신의 옥수수밭을 거닐다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올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하지만 반복되는 계시 끝에 '그것'이란 야구장이고 '그'란 전설 속으로 사라져간 야구선수라는 비밀을 풀어낸 레이는 더욱 황당무계한 짓을 저지른다. 실제로 자신의 옥수수밭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허름한 야구장을 만드는 것이다.

필 앤든 로빈슨 감독의 <꿈의 구장>(1989)은 황당한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전해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메시지는 그 황당함을 간단히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레이가 만든 '꿈의 구장'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의 공간이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는 과거와 현실이 뒤섞이고, 이승과 저승이 넘나들며, 현실과 이상이 서로를 껴안는다. 누가 이 공간을 찾는가 꿈을 저버렸거나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했거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속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불행한 영혼들의 단 한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야구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1919년의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은 야구도박사들과 결탁해 승부조작에 가담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악질 구단주에 대한 은밀한 보복이었다. 당시 미국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이 희대의 스캔들은 결국 법정에까지 서게 되어 선수들은 평생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게된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억울했던 것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맨발의 조'(레이 리오타). 데뷔하던 해의 평균 타율 0.408로 2004년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루키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1919년에도 평균 타율 0.375를 지켰고 단 하나의 수비실책도 범하지 않았는데도 이 승부조작 사건과 연관되어 ‘명예의 전당’의 입성을 거부당했던 것이다.

W.P.킨셀라의 실명소설 <맨발의 조>를 토대로 만들어진 <꿈의 구장>은 이 불운한 저승의 야구선수를 마법의 공간으로 불러내어 상처를 어루만지고 못다한 꿈을 펼쳐보이게 한다. 그 위안과 상생의 꿈이 참으로 따뜻하다. 단역에 불과하지만 보다 인상적인 캐릭터는 ‘문라이트’ 그레이엄(버트 랭커스터). 1905년 9회초에 수비수로 교체되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으나 결국 단 한번도 타석에 서보지 못한채 야구장을 떠나야 했던 그는 남은 평생을 의사로 살아가며 가슴앓이를 겪어야 했다. 이 불행한 영혼을 타석에 세울 수 있는 곳도 오직 '꿈의 구장'뿐이다.


화려함 속에 숨은 비정의 세계 : 달라스의 투혼
(기사입력 2004-04-20 17:56)

프로스포츠는 화려하다. 영웅적인 선수와 열광하는 관중들 그리고 엄청난 연봉. 나는 한때 프로스포츠에 대하여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의문을 가져봤던 적이 있다. 도대체 어떤 계산법을 썼길래 연봉 수백억원의 프로선수들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누군가 그들에게 수백억을 지출하는 것은 그들이 그 이상의 돈을 벌어다 주기 때문이다. 프로스포츠는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자본주의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게임에는 베팅하지 않는다.

프로선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주식이다. 주가가 오르면 주식의 소유자가 돈을 번다. 하지만 주가가 떨어지면 재빨리 팔아버리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값을 낮춰도 사갈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휴지조각이다. 휴지조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코를 푸는 데 쓰거나 찢어버릴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화려하면서도 비정하다. 테드 코체프 감독의 미식축구영화 <달라스의 투혼>(1979)은 프로스포츠라 이름 붙여진 자본주의의 비정한 시장논리를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필(닉 놀테)은 매일 아침 고통 속에서 깨어난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의 직업인 미식축구 자체가 격렬한 몸싸움을 요구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강철같은 몸뚱아리’란 이미 추억 속의 전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체력이 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플레이 역시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제 은퇴할 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 퇴물선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필은 은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식축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미식축구밖에 없는 것이다.

<달라스의 투혼>을 보면서 자본주의를 생각한다. 그 화려한 외양 밑에 숨겨진 쓰라린 절규를 직시하는 일이 고통스럽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프로선수란 화려한 스타가 아니라 고용상태마저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일 뿐이다. 필의 효용가치가 다 되었음을 직감한 구단주는 등을 돌린다. 본래 자본주의가 등을 돌릴 때는 칼바람이 이는 법이다. 구단주가 사립탐정까지 고용하여 필의 뒷조사를 한 끝에 그의 약물복용 사실을 밝혀내어 일방적인 무보수 해고를 통고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염병할, 정말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로군!


장벽을 깨고 달려나가자
: 브레이킹 어웨이(기사입력 2004-04-13 17:42)

열아홉 살엔 누구나 경계인이 된다. 청소년기는 벗어났으나 아직 성인은 되지 않은 시기, 혹은 뾰족한 대안은 없으나 어쩐지 기성사회에 편입되기는 싫어 막무가내로 뻗대는 시기. 이 시기에 저 홀로 사회 속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 만큼 난감한 순간도 따로 없다. 덕분에 열아홉 살이란 청춘영화의 영원한 테마가 된다. 김성수의 <비트>가 위태롭게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이 불안한 영혼들을 태웠다면, 피터 예이츠의 <브레이킹 어웨이>(1979)는 오직 육체의 힘만으로 나아가려는 자전거 위에 이 출구 없는 영혼들을 태운다.

데이브(데니스 크리스토퍼)는 한심한 열아홉 청춘이다. 고등학교는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그 이후론 도무지 풀리는 일이 없다. 대학진학에는 실패했고 취직도 안되며 군대에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디애나주의 대학도시 블루밍턴에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문이다. 데이브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은 엉뚱하게도 이탈리아다. 그는 이탈리아 자전거팀의 광팬으로서 그들처럼 되는 게 꿈이다. 그래서 그는 짝사랑하는 여대생에게 자신이 이탈리아 교환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온갖 해괴한 소스를 버무려 이탈리아 요리를 만들어 먹고, 멘델스존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의 4악장을 줄기차게 듣는다.

유고 출신의 시나리오작가 스티브 테시크는 청춘영화라는 낯익은 장르 속에 계급문제와 실업문제 그리고 자기정체성의 발견이라는 힘겨운 주제를 솜씨 좋게 담아내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브레이킹 어웨이>는 그 이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등의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성을 갖춘 영화다. 피터 예이츠의 섬세한 연출 못지 않게 인상적인 것은 패트릭 윌리엄스의 음악이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나 비발디의 <사계>는 이 곡들이 애당초 자전거 경주장면을 위하여 작곡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감동적인 영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브레이킹 어웨이>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 뛰쳐나가 자전거를 타고 싶어진다. 때마침 내일은 '전국적인 쓰레기 청소를 위해 국경일로 지정된 날'이다. 일찌감치 일어나 '쓰레기 청소'를 해치운 다음 한결 깨끗해진 내 나라 내 강산을 자전거로 마음껏 달린다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브레이킹 어웨이'가 뜻하는 바 그대로 장벽을 깨부수고 달려나가자!


스타와 팬에 대한 쓰라린 통찰 : 더 팬
(기사입력 2004-04-06 17:58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얼핏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미 그 질문 속에 현답을 품고 있는 우문이다. 서로의 꼬리를 물려는 형국으로 영원히 맴돌고 있는 이 태극 문양의 역동적인 질문을 프로스포츠에도 그대로 대입시킬 수 있다. 스타가 먼저냐 팬이 먼저냐 해답은 질문과 같은 형식의 태극 문양이다. 스타는 팬을 만들고 팬은 스타를 만든다.

바비(웨슬리 스나입스)는 3년 연속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 날뛴 사람은 길(로버트 드 니로)이다. 바비는 물론 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막연하게 ‘팬’이라 분류되는 불특정다수들 속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길은 바비의 모든 것을 낱낱히 꿰고 있다. 바비는 무료하고 희망 없는 길의 삶에 있어 절대적 우상이요 유일한 기쁨이었던 것이다. 길은 바비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니 스코트 감독의 영화 <더 팬>(1996)은 이 두 남자의 격돌을 다룬다. 스타와 광팬이 어떻게 맞부딪칠 수 있냐고 본래 애정과 증오는 한 몸이다. 태극 문양을 보라. 애정의 극단은 증오의 꼬리를 물고 있다. 바비의 슬럼프가 그의 라이벌인 후안(베네치오 델토로)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판단한 길은 아무렇지도 않게 결단을 내린다. 자신이 세일즈해오던 사냥용 칼로 후안을 찔러버리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악몽의 시작에 불과하다.

환상은 현실과 마주치면 화학작용을 일으켜 환멸로 변한다. 우연을 가장한 연출 끝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자신의 우상과 직접 대면하게 된 길이 맛보게 되는 것이 바로 쓰라린 환멸이다. 오늘의 너를 만든 건 바로 나야. 내게 끝없이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나를 무시하고 조롱해 로버트 드 니로는 무서운 배우다. 그의 신들린 연기는 무엇보다도 집요한 광기를 표현할 때 가장 섬뜩한 빛을 발한다. 이제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하여 사납게 치닫는다. <더 팬>은 야구영화라기보다는 스릴러에 가깝다. 하지만 프로스포츠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스타와 팬의 관계에 대하여 가볍게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는 사회심리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끊고 뛰어내려라 : 컷어웨이
(기사입력 2004-03-30 18:09)

가이 매노스는 익스트림 스포츠계와 액션영화 스턴트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스카이다이빙으로 유명한데 여지껏 1만회 이상을 하늘에서 뛰어내렸으며 모두 26개의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당시 하늘을 가르며 날아 와 주경기장에 사뿐히 착지했던 놀라운 묘기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극한의 위험 속에서만 희열을 느낀다는 그는 <클리프행어>, <이레이저>, <고공침투> 등의 영화 속에서 펼쳐진 고난도의 액션을 맡은 초특급 스턴트맨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어깨 너머로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제작 기법들을 모두 익힌 이 희대의 모험가는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를 창안해낸다. 세계 최강의 스카이다이버들과 스카이다이빙 촬영자들을 모두 모아 '골든 패러수트 엔터테인먼트'라는 영화사를 차린 것이다. 가이 매노스가 이 영화사를 통하여 만든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컷어웨이>(2000)이다. 그가 시나리오와 스턴트 지도 그리고 감독까지 겸한 이 영화는 배우와의 계약서에 "직접 스카이다이빙을 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요구조건을 내세워 촬영 전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시속 200㎞로 하늘에서 떨어지며 연기를 해야한다는 이 끔찍한(!) 계약서에 기꺼이 사인한 배우들은 누구일까 최고의 스카이다이버이면서 동시에 마약 운반책인 레드라인 역할은 톰 베린저가 맡았고, 미국 관세요원이면서 마약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위장 잠입한 빅터는 스티븐 볼드윈이 맡았다. 개인적으로 누구보다도 반가왔던 배역은 미국프로농구계의 소문난 악동 데니스 로드맨이다. 그는 자신의 성품 그대로 건방지고 포악하되 최고의 기량을 갖춘 스카이다이버 터보 역할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최고의 모험가라고 하여 곧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플롯이나 캐릭터 따위를 놓고 따질 때 <컷어웨이>는 그다지 뛰어난 영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스카이다이빙 장면들만은 원 없이 만끽할 수 있다. 제목으로 쓰인 ‘컷어웨이’란 ‘주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을 때 그것을 잘라내고 보조낙하산을 펼치는 행위’를 뜻하는 전문용어인 동시에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현실에 대한 모든 미련을 아낌없이 잘라버려야 한다”는 이 영화의 ‘난폭한’ 주제를 암시한다.


불혹의 신인투수 "꿈은 이루어진다" : 루키
(기사입력 2004-03-23 18:07)

영화제작자 마크 치아르디는 젊은 시절 한때 미국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의 투수로 활약했던 야구선수 출신이다. 어느 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뒤적이던 그는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한다. 마흔 살이 다 된 어느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아직도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문제의 인물인 짐 모리스의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그는 돌연 무릎을 친다. 짐은 바로 마크가 마이너리거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룸메이트였다.

짐은 촉망받는 좌완투수였으나 십여년 전 심각한 어깨부상으로 마운드를 떠나야 했던 불운한 사내였다. 외면상 그는 이제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진 평범한 중년남자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접어두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꿈이란 메이저리그의 선발투수가 되는 것이다. 짐의 꿈과 도전에 감명을 받은 마크가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던질 즈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메이저리그 트라이아웃(투수선발 테스트)이 짐을 부른 것이다.

짐이 마운드에 올라섰을 때 관중석을 메운 것은 냉소와 조롱 뿐이었다. 마흔이 다 되었고 어깨마저 부실한 늙다리 사내가 루키(신인투수)가 되어 보겠다고 하지만 짐이 혼신의 힘을 다 해 첫 번째 공을 던졌을 때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무려 시속 98마일(157Km)의 광속구를 뿌려대는 괴물투수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짐 모리스는 최근 40년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최고령 신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존 리 핸콕 감독의 <루키>(2002)는 이 특별한 남자의 감동적인 실화를 스크린에 담은 정통 야구영화다.

이 영화는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영화 속의 짐(데니스 퀘이드)이 최고령 루키로 마운드에 처음 오르는 감동적인 장면은 레인저스와 인디언스의 실제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막간에 전격 촬영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야구장은 물론 박찬호 덕분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 알링턴 볼파크다. 짐은 자신의 인생을 증언한 영화 <루키>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벨파스트의 권투와 사랑 : 복서(기사입력 2004-03-16 17:21)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다. 매우 유서 깊고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동시에 영국으로부터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에 울분과 폭력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대니(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한때 벨파스트에서 가장 사랑받던 ‘거리의 왕자’였다. 하지만 그가 전도양양한 복서의 길을 버리고 IRA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무려 14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귀향했을 때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니는 묵묵히 이 슬픔과 혼돈의 도시 한 귀퉁이에 자신만의 권투도장을 차린다.

짐 쉐리단 감독의 <복서>(1997)는 이 벨파스트라는 ‘골치 아픈’ 공간 속에서 권투와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이 영화 속에서는 민족주의와 종교적 갈등 그리고 조직과 개인의 투쟁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도록 엇물려 있다. 대니라는 캐릭터의 실제 모델은 한때 페더급 세계챔피언으로서 아일랜드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배리 맥기건이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영화 속에 그대로 표출시키고자 스크린 뒤의 트레이너 역을 기꺼이 떠맡았다.

대니는 정치적 환멸과 조직의 쓴맛을 두루 맛본 씁쓸한 사내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 과거의 연인이었던 메기(에밀리 왓슨)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메기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고, 그 남자마저 IRA활동으로 현재 투옥 중이다. 대니는 이 모든 엄혹한 현실에 맞서 권투에만 전념한다. 이 영화 속에서 권투란 상처받은 남자가 자신을 지키고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가치인 사랑이 위협받게 되었을 때 그는 최후의 일전을 치루기 위하여 다시 링에 오르게 된다.

<복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영화다. 이 영화는 정치와 혁명과 사랑에 대하여 심각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것은 다름 아닌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다. 그가 아카데미 촬영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크리스 멘지스와 함께 완성해낸 치열하고 박진감 넘치는 권투 시퀀스들은 보는 이를 전율하게 만든다. 그를 포함하여 조연과 단역을 맡은 거의 모든 배우들이 영국이 자랑해 마지않는 왕립 셰익스피어극단 출신들이니 모처럼 ‘최고의 연기들로 가득 찬 성찬’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영화다.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영웅 : 알리
(기사입력 2004-03-09 18:06)

그때 나는 열 두 살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4형제는 마루에 들여놓은 자그마한 흑백텔리비전 앞에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들 중에서도 무하마드 알리가 이길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중년의 사내였으며 '한때 유명했을 뿐인' 퇴물복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상대는 당시 파죽지세의 KO행진으로 40연승의 대기록을 달성한 24살의 ‘도살자’ 조지 포먼이었으니까.

경기는 시시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던 호언장담은 추억 속의 유행가였을 뿐이다. 알리는 경기 내내 가드로 얼굴을 가리고 얻어맞기만 했다. 하지만 너무 지루하여 하품이 나올 즈음 경천동지할 반전이 일어났다. 알리가 돌연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더니 포먼을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승부는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무려 30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포먼이 쓰러질 때의 그 항공모함이 침몰하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다. 그것은 홍수환의 4전5기와 더불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명승부였다.

내가 알리의 위대함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쏟아 붓는 듯한 말투와 당돌한 자신감 그리고 현란한 푸트워크는 알리라는 복잡한 다면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반전운동의 상징이었고 흑인민권운동의 대변자였다. 미국을 지배하는 백인주류사회에서 볼 때 그는 차라리 일종의 악몽이다. 알리는 포먼과의 명승부를 벌이기 10년 전인 1964년 세계헤비급챔피언에 등극하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될 것이다!"
 
마이클 만 감독의 <알리>(2001)는 이 격동의 10년 세월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알리 역을 맡은 배우는 래퍼로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윌 스미스인데, 그는 알리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커 오랫동안 이 역할을 맡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알리 전성기의 실제 코치였던 안젤로 던디(론 실버)가 영화 전체의 권투자문을 맡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어째서 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영웅'으로 무하마드 알리를 첫 손가락에 꼽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펑크의 핏빛 카니발 : 동경의 주먹
(기사입력 2004-03-02 18:42)

도쿄의 평범한 보험외판원 츠다(츠카모토 신야)와 그의 아내인 히즈루(후지이 카오리)의 집에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든다. 츠다의 옛 친구인 고지마(츠카모토 코지)는 탄탄한 근육과 불쾌한 눈빛을 가진 정체불명의 사내다. 기이한 삼각 동거의 긴장이 높아질 즈음 고지마는 폭탄선언을 한다. “난 네 여자를 가졌어. 그녀도 나와의 관계를 즐기더군.” 츠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지만 결과는 이미 내정되어 있다. 고지마는 가공할 위력의 펀치를 구사하는 권투선수였던 것이다.

그 단 한방의 주먹 때문에 츠다와 히즈루의 일상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급변한다. 유순한 샐러리맨이었던 츠다는 핏발 선 두 눈을 부라리며 권투도장을 찾고, 무료한 주부였던 히즈루는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며 제 몸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츠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지마를 이길 수는 없다. 덕분에 그들의 육체는 언제나 피투성이다. 츠다는 링 위에서 온 몸의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히즈루는 엽기적인 피어싱에 중독되어 계속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동경의 주먹>(1995)은 20세기말 사이버펑크 영화의 기념비적 명품이다. 사이버펑크라는 매혹적이되 복잡한 개념을 설명해내기에는 내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 작다. 여기서는 다만 그것이 체제전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만을 기억해두자. 덕분에 이 영화 속에 묘사되는 인간의 육체는 마치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보인다. 그들은 벽을 뚫을 만큼 강력한 주먹을 휘두르며 서로의 육체를 파괴하려는 죽음의 권투시합을 벌인다.

사이버펑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즐기기가 버거울 것이다. 내용은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하고 표현은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다. <동경의 주먹>에 묘사된 권투는 스포츠가 아니라 필살기다. 과장된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현란하게 편집된 권투장면들이 하나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낯선 카타르시스에 몸을 떨게되는 것은 왜일까 <동경의 주먹>은 일종의 카니발이다. 그리고 모든 카니발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체제유지를 위해 억눌러왔던 모든 본성들을 마음껏 표출한다.


흑백갈등 다룬 감동의 실화 : 리멤버 타이탄
(기사입력 2004-02-24 18:30)

1971년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당시 최악의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흑백 갈등을 잠재우려는 개혁적 조처로 흑인 고교와 백인 고교의 통폐합을 실시한다. 새로 통합된 T.C. 윌리엄스 고교 미식축구부의 수석코치로 내정된 인물은 흑인 허먼 분(덴젤 워싱턴). 한때 킹 목사와 함께 시위를 주도했으며 KKK단과도 당당히 맞섰던 터프가이다. 그에게 밀려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 본래의 코치 빌 요스트(윌 패튼) 역시 만만한 사내가 아니다. 해당 연도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 후보로 선정될 만큼 짱짱한 실력을 갖춘 베테랑인 것이다.

보아즈 야킨 감독의 <리멤버 타이탄>(2000)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통 미식축구영화다. 이 영화에서 맞붙는 것은 분과 요스트만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들 밑에서 ‘오월동주’의 지옥선을 타게 된 백인 선수들과 흑인 선수들 간의 갈등이 영화 전체를 들끓는 용광로처럼 만든다. 시나리오작가로서 나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 숱한 캐릭터들이 저마다 생생한 인물들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이 영화는 감동적인 실화이며 정통 스포츠영화인 동시에 캐릭터들의 백과사전이다.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에 요스트는 반발한다. “우리는 고교 미식축구부지 해병대가 아니오.” 분은 요스트를 외면한 채 선수들을 더욱 다그친다. “화가 나 좋아! 너희들에겐 분노가 필요해! 미식축구란 바로 그 분노를 승화시키는 기술이야!” 이 카리스마 넘치는 선장 덕분에 지옥선은 뜻밖에도 꽃놀이배로 변해간다. 하지만 흑백의 선수들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부둥켜 안을 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서로를 증오하고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백인고교 미식축구팀들은 너무도 강하다.

제목 속에 등장하는 '타이탄'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자 T.C. 윌리엄스고교 흑백합동미식축구부의 이름이기도 하다. 타이탄을 기억하자니 무슨 뜻일까 분이 합동전지훈련 도중 새벽안개 자욱한 게티스버그 국립묘지 앞에서 행한 명연설이 이 영화의 속 깊은 주제를 잘 드러낸다. "이곳에 묻힌 자들이 내지르는 영혼의 소리를 들어라. '우리들은 원한을 품고 내 형제를 죽였다. 증오가 우리 가족을 망쳤다.' 너희들더러 당장 서로를 좋아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서로 존중하라. 이들의 죽음이 남긴 교훈을 헛되이 말라."


사춘기 소녀의 통쾌한 바나나킥
: 슈팅 라이크 베컴
(기사입력 2004-02-17 17:56)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계 사춘기 소녀 제스(파민다 나그라)의 일상은 온통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인도 상류계층 특유의 엄격한 가정교육은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인종차별의 벽은 그녀의 행동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제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나는 때는 단 한 순간뿐이다. 웃통을 벗어제낀 껄렁한 동네청년들과 어울려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는 것. 다락방에 마련된 그녀의 침대 위에 걸려 있는 것은 물론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대형 브로마이드다.

거린더 차다 감독의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2002)는 그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실존인물의 이름을 저렇게 막 갖다 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우려는 일찌감치 접어두어도 좋다. 베컴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승낙해 준 덕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축구코치 사이먼 클리포드가 직접 배우들의 훈련을 맡았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전세계가 월드컵의 열기로 뜨겁던 2002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의 자국영화시장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영화 속에서 축구는 장벽 속에 갇힌 한 외로운 소녀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스는 동료 여자축구선수 줄스(키이라 나이틀리)와 청년 코치 조(조나단 라이 레이어스)의 우정과 사랑에 힘입어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장벽들을 하나 둘씩 넘어간다. 미국 여자프로축구리그의 스카우터가 관전했던 최후의 결승전에서 그녀가 시도했던 프리킥 장면은 영화의 핵심을 단 한 컷으로 보여준다. 철통같은 수비벽을 쌓고 있는 상대선수들의 모습이 전부 그녀의 가족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저 수비벽을 뚫고 골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제는 단 하나뿐인 방법을 가르쳐준다. “베컴처럼 휘어서 차라(Bend It Like Beckham)!" 그녀가 성공시킨 통쾌한 바나나킥은 청춘의 도전이요 장벽의 극복이며 자유의 비상이다. 이 감동적인 순간과 교차편집된 인도 전통혼례의 흥겨운 피로연 장면은 이 작지만 유쾌한 승리를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킨다. 사춘기 자녀를 둔 가족이라면 모처럼 한 자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관람하며 서로의 말문을 터나가기에 적격인 영화다.


외로운 청춘의 헛손질 : 키즈리턴
(기사입력 2004-02-10 18:15)

학교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단지 ‘문제아’라고 뭉뚱그려 부를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름도 있고 개성도 있다. 마사루(가네코 켄)는 껄렁대는 떠벌이고, 신지(안도 마사노부)는 소심한 샌님이다.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시시한 반항이나 일삼던 이 아이들은 어느 날 멋 모르고 삥을 뜯었다가 권투선수라는 녀석에게 끌려가 죽도록 얻어터진다. 덕분에 녀석들은 돌연 자기가 해야할 일을 깨닫는다. 바로 권투선수가 되는 것이다.

마사루에 끌려 도장을 찾은 신지는 그곳에서 엉뚱하게도 자신에게서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견한다. 학교에서 일진으로 통하던 마사루를 링 위에서 KO시켜 버린 것이다. 마사루는 도장을 떠나 야쿠자 똘마니가 된다. 신지는 전도유망한 신인 권투선수로 성장해나간다. 일반적인 상업영화라면 이쯤에서 그 끝이 보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성공하고 사랑을 얻거나 한 명쯤은 비참하게 죽는 것이다. 하지만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즈리턴>(1996)은 그런 할리우드 장르영화식 플롯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한다.

마사루는 야쿠자 세계에서도 허풍만 떨다가 쫓겨난다. 신지는 퇴물 권투선수의 유혹에 빠져 술을 입에 대다가 데뷔전에서 허망하게 쓰러진 후 링에서 내려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 두 녀석은 텅 빈 운동장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며 저 유명한 마지막 대사들을 읊조린다. “우린 정말 끝난 걸까” “바보야, 우린 아직 시작도 안한 거라구.” 기타노 다케시 역시 영화 속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구.” <키즈리턴>은 권투영화라기보다 성장영화다. 이 영화 속의 권투는 외로운 청춘의 헛손질이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고 모든 것에 서투르기만 하며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외로운 청춘들이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허공을 향해 내뻗는 서글픈 헛손질. 그 적나라한 육체의 시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청춘의 원초적인 슬픔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권투만한 스포츠는 없다. 미묘한 슬픔을 머금은 그로테스크한 유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기타노 다케시만한 감독도 없다. <키즈리턴>은 일본이 낳은 이 르네상스적 예술가가 일찍이 세상에 내놓았던 처녀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한계는 없다 : '97 K2
(기사입력 2004-01-27 18:13)

달새는 달만 생각하고 술꾼은 술만 생각한다. 내게 있어 그런 외골수적 집착의 대상은 산이다. 덕분에 중고 비디오숍을 뒤질 때에도 제목에 산 비슷한 것만 들어있으면 무조건 손이 간다. 티에리 도나르 감독의 <‘97 K2>(1994)는 그런 경로로 내 손에 들어온 영화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완전한 사기다. 1997년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K2가 등장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선 제목의 중고비디오를 사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니체주의 산악인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극한등반가 마크 트와이트가 주연을 맡았던 까닭이다.

알프스 유럽영화 촬영소에서 제작한 이 작품의 원제는 <한계 끝까지 밀어붙이기>(Pushing the limits)인데,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슬TV의 극한도전 생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프로그램의 여성진행자 피오나(피오나 젤린)가 샤모니 부근의 작은 시골역에서 알프스 지역 모험가 그룹의 리더인 지고르(마크 트와이트)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지고르는 피오나를 산악구조대용 헬기에 태우고 장쾌한 알프스의 하늘을 날며 그 아래에서 각자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모험가 그룹의 친구들을 하나 하나 소개한다.

<‘97 K2>는 결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플롯은 엉성하고 캐릭터의 탐구도 빈약하며 연기마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작품을 만들고 출연한 사람들이 모두 영화의 아마추어들인 까닭이다. 대신 그들은 각종 익스트림 스포츠의 세계 최정상급 프로들이다. 산악스키 텔레마크 회전의 일인자 크리스 피르스베르, 베이스점프의 달인 도미니크 글레즈, 극한 스노우보드의 기린아 에릭 벨랭…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멋진 사나이들의 숨막히는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황홀한 영화다.

지고르가 빙벽등반과 알프스 스키점프를 거쳐 빠져든 분야는 보드를 타고 하늘을 나는 스카이 서핑.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위를 나르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자유를 향해 비상하는 한 마리의 독수리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지고르 최후의 도전은 하늘에서 뛰어내려 스카이 서핑을 하다가 낙하산을 펼치지 않은 채 알프스의 만년설 사면 위로 사뿐히 착지하여 그대로 스노우보드를 타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영원히 잊지 못할 12번째 샷 : 틴컵
(기사입력 2004-01-13 17:15)

스포츠영화 전문감독으로 유명한 론 셸튼의 <틴컵>(1996)은 낙오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레슨프로 로이(케빈 코스트너)의 US오픈 출전기를 다룬 영화다. 그가 다시 진지한 마음으로 골프채를 잡게된 까닭은 지극히 단순하다. 자신에게 레슨을 받으러온 매력적인 정신과 여의사 몰리(르네 루소)에게 홀딱 반한 것.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의 애인은 대학시절에는 자신보다 하수였으나 지금은 프로 골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데이비드(돈 존슨)였다. 결국 로이는 데이비드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몰리를 빼앗아오기 위하여 US오픈에 출전한다.

론 셸튼의 영화가 늘 그래왔듯 <틴컵> 역시 어른들의 유머와 시적인 대사들로 그득하다. 로이가 병맥주를 홀짝이며 주정하듯 늘어놓는 골프예찬론은 그대로 한편의 서정시다. 골프와 섹스의 공통점으로 “능숙하지 못해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울 때면 그의 전작인 <19번째 남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전작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이라는 캐릭터다. 언제나 일을 망치곤 하는 ‘못된 성격’의 핵심인 될대로 되라 식의 허무주의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파워가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안전하게 치면 된다. 버디면 우승이고 파면 비겨서 연장전에 들어간다. 그런데 굳이 이글을 노릴 필요가 있을까 로이는 그러나 이글을 노린다. 첫 번째 공이 그린에 안착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굴러 연못 속으로 빠진다. 그리고 두 번째 공, 세 번째 공, 네 번째 공도. 이제 우승은커녕 연장전도 물 건너갔다. 그래도 로이는 계속 같은 시도를 한다. 시골뜨기의 스타 탄생을 기대하던 갤러리들은 물론이거니와 방송진행자들마저 진저리를 쳐대며 욕설을 퍼붓는다. “저 친구 완전히 미쳐버린 거 아니야” 광기와 집요함에 사로잡힌 로이는 결국 12번째 샷에서 성공한다. 엄청난 비거리를 날아 연못을 완전히 건너뛰었을 뿐 아니라 홀인원까지 이룩해낸 것이다. 갑자기 목이 메이며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몰리는 그에게 달려와 와락 안기며 사랑에 빠진 여인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을 선사한다. “5년만 지나면 올해 US오픈 우승자가 누구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친 12번째 샷은 영원히 기억될 거에요!”


우리가 잃어버린 유년의 여름 :
보리울의 여름(기사입력 2004-01-06 18:27)

한여름의 장마비가 시골 오지학교의 자그마한 운동장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는다. 김 스테파노 신부(차인표)가 이끄는 성당고아원 아이들과 우남 스님(박영규)이 이끄는 마을 아이들의 축구경기는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다. 장대비 속의 진흙탕 축구는 이따금 격투기로 돌변하곤 하지만 끝내는 모두가 엉망진창으로 놀아나는 신명 넘치는 축제로 마무리된다. 이윽고 먹구름을 뚫고 햇살이 반짝 비출 때 큰 소리로 동요를 합창하며 마을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후련해진 가슴이란!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2003)은 따뜻한 영화다. 보리울은 우리 나라 깊은 산골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지마을. 서울 아이들은 고사하고 바로 코앞에 자리 잡은 읍내 아이들에게서조차 업신여김을 당하고 거지 취급을 받아 잔뜩 주눅이 들어온 이 마을 아이들을 한 데 묶어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축구다. 진흙탕 속의 한판승부를 통해 서로 의기투합하게된 보리울의 아이들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아나선다. “우리 이 기회에 아예 단일팀을 만들어서 읍내 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과 한번 붙어보는 게 어때”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스포츠영화의 플롯이란 빤한 법인데 <보리울의 여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초반부의 진행이 매우 더디어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예의 장마 시퀀스를 통과하면서부터 캐릭터들이 살아나고 드라마에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는 깐깐하고 고지식해 보이지만 푼수기질과 더불어 따뜻한 가슴을 숨기고 있는 원장수녀님(장미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들이 빚어내는 고만고만한 일상사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문득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운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보리울의 여름>에는 그리운 것들이 넘쳐난다.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 흙먼지 풀풀 이는 시골운동장, 장터에서 사먹는 잔치국수, 맑은 시냇물 속에서의 멱감기, 처녀(수녀)들의 방 훔쳐보기, 때가 꼬질꼬질 흐르는 촌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출전하는 축구경기! 폭력과 섹스만이 난무하는 작금의 영화판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을씨년스럽고 지루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유년의 여름을 생각한다.


레게 리듬에 맞춰 멋지게 달리자! : 쿨러닝(기사입력 2003-12-30 18:27)

겨울철스포츠 중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는 단연 봅슬레드다. 흡사 놀이동산의 청룡열차 궤도처럼 만들어진 얼음구덩이 속을 쏜살같이 내닫는 선수들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총알 탄 사나이’들이다. 제일 앞에 탑승한 조종자의 지휘에 따라 과격한 코너링을 할 때마다 일제히 체중을 옮겨싣는 선수들의 날랜 동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찬탄이 절로 나온다. 봅슬레드를 즐기려면 당연히 만년설의 급사면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 종목의 전통적인 강국은 알프스를 품고 있는 유럽이나 록키를 끼고 있는 북미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1988년 캐나다 캘거리 겨울철올림픽에서는 이 기존의 상식이 여지없이 깨진다. 봅슬레드 참가국 접수창구의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다. “어느 나라에서 왔다구요” 국가대표팀 감독 어빙(존 캔디)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반복한다. “우리는 자메이카 봅슬레드팀이요.” 맙소사, 자메이카라니! 그곳은 일년 내내 여름뿐인 자그마한 섬나라가 아닌가 반바지에 샌달을 신고 밥 말리의 레게음악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릴 뿐인 게을러 터진 사람들이 얼음나라에 눈썰매를 타러 왔다고라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게다가 그들은 단지 ‘참가’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니라 놀라운 기록을 달성해 전세계 스포츠팬들의 입을 쩍 벌려놓았다. 존 터틀텁 감독의 <쿨러닝>(1993)은 이 기상천외한 코미디 겸 감동적인 실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영화다. 이들의 훈련기와 출전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웃기다 못해 가슴 한 켠이 짠해진다. 이들은 주어진 조건을 탓하지 않는다. 이 낙천적인 자메이카인들에게 있어 가난이란 불편한 장애물이요, 조롱이란 깨부수어야할 편견일 뿐이다.

<쿨러닝>은 일급 스포츠영화일 뿐 아니라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이기도 하여 개봉 당시 미국 내에서만 800억원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제목으로 쓰인 ‘쿨러닝’은 자메이카 봅슬레드팀의 구호인데 글자 그대로 “멋지게 달리자!”라는 뜻이다. 영화 전편에 깔려 있는 레게음악 역시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든다.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유쾌한 영화 <쿨러닝>이 전하는 세밑 메시지는 이렇다. “꿈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나아져요.” 힘겨웠던 한 해도 오늘로 끝이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쿨러닝!”


텍사스 깡촌의 유소년축구단 : 빅그린(기사입력 2003-12-23 18:57)

영국 출신의 교환교사 앤나(올리비아 다보)는 새로 부임해온 학교에 절망한다. 텍사스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여서 끝없는 잡초밭만이 우거져 있는 시골깡촌 엘마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레 '패배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문제를 내주면 아이들은 반문한다. "어차피 가게 점원이 될 텐데 이런 걸 왜 풀어야 하죠" 점원에게도 수학 능력은 필요하다고 윽박질러도 소용없다. "그런 건 전자계산기가 다 해줘요." 지리수업 역시 지리할 따름이어서 하품만을 자아낸다. 궁지에 몰린 앤나는 지구본을 떼어내 헤딩으로 하는 볼트래핑 묘기를 보여주며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럼 우리 이런 걸 해볼까" 앤나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축구다.

하지만 미국 깡촌의 아이들에게 축구란 생소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공놀이일 따름이다. 그들은 '풋볼'과 '사커'를 구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영국 출신의 축구광 여교사와 미국 깡촌의 지리멸렬한 아이들. 홀리 골드버그 슬론 감독의 영화 <빅그린>(1995)은 이 대목에서 일찌감치 코미디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 오합지졸의 유소년축구단에 앤나에게 반한 마을 유일의 경찰 톰(스티브 구텐버그)이 코치를 자처하며 가세하면서 점입가경의 유쾌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빅그린>은 디즈니영화답게 아이들의 숨겨진 내면과 잠재된 능력의 표출에 주목한다. 무능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증오하는 불량소녀, 발육이 늦어 또래집단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꼬마, 상대편 공격수들을 상상 속의 악당들로 착각하여 매번 눈을 감아버리는 엉터리 골키퍼,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뒤켠에 숨어있어야만 하는 멕시코계 불법이민 소년.

<빅그린>은 축구가 어떻게 이들 모두에게 내면의 억압을 깨부수고 당당하게 세상과 맞설 용기를 주게 되었는가를 디즈니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보여준다.

디즈니가 만든 아동용 영화에서 심오한 작품성을 찾으려 한다면 넌센스다. 하지만 유쾌하게 배를 잡고 웃는 과정에서 ‘건전한 교훈’을 한 두 개쯤 낚아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작품의 존재가치는 충분한 것이 아닌가 <빅그린>은 소외된 아이들을 감싸안으며 넌지시 말한다. 패배자는 없다. 네 꿈을 펼쳐라.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모처럼의 성탄연휴를 맞아 온가족이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야구 경기 :
YMCA 야구단(기사입력 2003-12-16 18:27)

야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기원만큼은 확실하다. 대한제국의 말기인 1905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고 새것이 옛것을 갈아치우는 혼돈의 시대, 황성(서울) 거리 한복판에 낯선 방이 나붙는다. "YMCA 베쓰볼 단원모집."
 
김현석 감독의 데뷔작 <YMCA 야구단>(2002)은 문헌상 조선 최초로 결성된 아마추어 야구단으로 기록되는 이 실존팀의 흥망성쇠를 애잔한 유머로 다루고 있는 영화다.

오랫동안 글공부에 매달려 왔으나 돌연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이호창(송강호)은 어느날 전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당시 막 득세하던 친일파의 아들 류광태(황정민)와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차며 놀다가 그것이 남의 집 마당으로 떨어져버린 까닭이다. 뜻밖에도 쪼그라들어 버린 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던 그에게 멋진 정장을 한 서양선교사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그건 발로 차는 공이 아니야. 손으로 던지고 방망이로 때리는 공이지. 베이스볼이라고 불러."

<YMCA 야구단>의 매력은 야구라는 신생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 시대를 다채롭게 조망해 본다는 데 있다. 서양선교사와 일본군인이 활보하던 거리, 유생으로 대표되던 옛 권위가 몰락하던 시대, 새로운 질서 앞에서 갈등하던 양반과 상놈,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기독교 계열의 신여성 민정림(김혜수)과의 어긋난 로맨스마저도 이 영화 속에서는 향수 어린 추억의 풍속화가 된다. 하지만 도대체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무슨 놈의 야구타령이냐고 너무 타박하지는 말기 바란다. <YMCA 야구단>은 그렇지 않아도 스포츠맨십과 민족의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영화의 유머는 안쓰럽고도 애잔하다. 스트라이크를 '수투락(秀投, 빼어나게 던지니 즐겁구나)'이라 고쳐 부르고, 포수가 마스크 대신 하회탈을 뒤집어쓰는 것은 은근한 실소를 자아낸다. 그 유머의 절정은 일본군 야구단과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말을 돌보는 도령(조성우)이 벽력처럼 내지르는 분노의 일갈이다. "암행어사 출도야!" 이 시대착오적인 단말마의 절규는 우리의 배를 잡게 만들고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렇다. 나라 잃은 백성은 서러울 뿐이다. 제 아무리 야구를 잘 한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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