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 사춘기

from 일상다반사 2006. 8. 24. 11:43

“사표 쓰고 싶어.”

그거, 당신 뿐이 아니야. 내 옆의 미경이도, 박대리도, 김과장도, 박부장도 다야 다. 혹 고등학교 때 대학 대신 삼청교육대에 입소해서 거기가 아닌 세상이라면 천국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나, 달라는 대로 연봉을 주고 주 4일 근무에 칼퇴근, 휴가 8주에 상사는 없는데다 보너스 600%, 학원비 교육비 다 나오고 내 생일, 엄마 생일, 동생 생일, 결혼기념일, 추석, 노동절, 설날, 단오까지 놀게 해 주는 그런 회사에 다니는 사람 빼 놓고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이야.


때려 죽여도 일 하기 싫은 날이 한달에도 보름은 넘는데, 이 길이 내 길 맞을까. 혹시 이 업종과 나는 상극 아닐까. 안정적인 게 최고라지만 혹시 내가 이 직장 이 책상머리에 붙박이장처럼 박혀서 몸만 늙은 채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이럴 때 하늘의 계시처럼 비슷한 다른 회사서 ‘경력자를 뽑는다’ 소문이 들리고, 마침 회사에서는 높은 퇴직급여 조건으로 희망퇴직자를 받는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까, 내 허영의 장난일까. 이 순간 나는 여자 햄릿이 된다.상사에게 목소리도 높일 줄 알고, 자꾸 이직의 유혹이 오고, 창업이나 유학 생각도 나는 이른바 직장인 5년차들의 한결같은 버릇과 고민의 시기를 이른바 ‘직딩 사춘기’라 한다.

직장인 사춘기. 이런 말 실제로 있다.

자꾸 아침에 일어나기가 평소 이상으로 몹시 힘이 들고 일에 회의가 들며, 회사 내에 내 존재감이 없어 심한 상실감이 생겨 하루에도 몇 번 씩 이직을 결심하게 되는 상황을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이라고 한다. 최근 한 취업포탈사이트가 직장인 13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가운데 86.4%가 사춘기를 경험했으며 이 중 16%가 실제로 사표를 썼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스카우트) 직장인의 50%가 이직시 이것과 다른 업종을 희망한다고 나타났다.

즉, 오히려 옮기지 않겠다는 성실한 자세가 이상한 것이지, 이 생활 때려치우겠다고 몇 번 씩 큰 소리 치는 게 이 시대 직장인의 당연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보다 공부 못했던 아이가 돈 잘 벌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마련이다. 또 시집 잘 가 팔자 편 아이의 구찌 가방과 중형차도 속 뒤집어진다. 어떤 애는 과감히 접고 유학을 떠났다는데, 아프리카에 5천만 들고 가도 떵떵거리며 산다더라 하는 말들은 이 시기면 더욱 차고 넘친다. 그럼 사춘기를 맞은 직딩들의 특징과 생활을 한 번 살펴볼까?

직딩 5년차의 외형적 특성
남자는 이마가, 여자는 배가 커진다.
청바지보다 때로 정장이 편하다.
정면 두부 중앙에 두 눈이 붙어 있음에도 말(馬)처럼 시야가 좌, 우, 뒤 300도 까지 넓어진다.
어려보이는 헤어스타일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유학원이나 대학원 광고, 편입 학원을 기웃거리게 된다.

직딩 5년차의 행동적 특성
지하철 역으로 가는 시간, 환승 구간, 역에서 회사까지 멀어도 10분 이상 걸리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식사, 화장, 낮잠, 은행 방문, 잠깐 쇼핑, 수다, 커피 타임까지 모두 해낸다.
업무용 전화를 받으면서 싸이질이나 메신저질을 할 수 있다.
상사에게 혼이 날 때 마인드콘트롤 해 평안한 명상에 빠질 수 있다.
회사 서버 차단을 뚫고 싸이나 메신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한 개 이상 알고 있다.
첫 인상으로 나에게 선인인지 악인인지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연말이면 내년 달력에 공휴일이 일요일과 며칠이 겹치는지, 연휴는 얼마나 있는지 휴가는 어떻게 붙여서 쓰는 게 유리한지 먼저 계산한다.

직딩 5년차의 심리적 특성
상사가 우습게 보인다.
잘 나가는 프리랜서 친구가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힘이 팍 들어간 신입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긴다.
친구의 결혼 소식에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
모은 돈, 쓰는 돈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직딩 5년차의 환경적 특성
경력직 모집 광고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창업 안내 신문기사를 스크랩 해가며 보게 된다.
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나를 쳐 올라오고 또 옻도 모르는 상사의 구박이 심해진다.

이 난관, 이 번뇌를 어찌할까
전문가들은 이직을 생각할 때는 6개월 이상 준비하고 충분히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사춘기 직딩에게 이미 남의 떡은 지금의 내 처지보다 훨씬 우아해 보이겠지만, 가 봐야 별 볼일 없을 가능성 또한 크기 때문이다. 배 커지고 입술주름 생기는 지금의 나에게 또 야근 철야가 지속되거나 숨 못쉬는 분위기일 때는 월급 많아도 곤란하다. 4대 보험은 물론 보너스, 퇴직금, 승급이 제 때 되는지, 휴가, 월차도 상세히 살펴야 한다. 아직 30% 이상의 회사가 여직원의 보건휴가를 제 때 챙겨주지 않고 있으며, 갖은 방법으로 직원의 휴가를 응징하거나 심지어 주6일 또는 주 7일 근무제로 직장인을 농락하는 회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직장인 3~5년차들은 이직의 기회가 많고, 경력과 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라는 잇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직 희망자 또한 많다. 그러나 옮기기 전에 생각 또 생각을 하라는 전문가들의 충고도 무시할 바 못된다. 잦은 이직은 경력관리에 마이너스다. 지저분한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치며 실속 없는 중년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이직하고자 떠난 직딩 신분 영영 못 찾는 수도 있다. 그래 한번 알아봤다.

직딩 사춘기 극복은?
마음을 편안히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자는 도덕 교과서식 카운슬링은 이제 나의 대뇌에 너무 많이 세뇌되어 용지걸림으로 삑삑댄다. 이직을 생각할 때에는 지금 연봉의 20%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경우엔 안 하는 것이 낫다는 충고가 들려온다. ‘습관성 이직’ 은 이력 감추기라는 이상한 버릇과 함께, 다닌 회사 기억 못하기, 사회 부적응자로 의심받기 등 다소 견디기 힘든 누명을 합병증으로 안긴다. 한번 이직은 얼마 가지 못해 또 다른 이직을 낳기 마련이라 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은 6개월마다 자신의 이력서를 점검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언제든 이직할 준비가 돼 있는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사춘기를 무사히 보내면 건강한 어른이 되지만 직딩 사춘기를 무사히 보내도, 언제 불지 모르는 명퇴의 칼바람과 불안한 미래가 기다리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시대 직장인들의 또 다른 고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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