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명료하게 만든다.
세월이 가면 감정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 토마스 만

토마스 만 [Mann, Thomas, 1875.6.6~1955.8.12]

독일의 소설가·평론가. 《마의 산》는 사랑의 휴머니즘으로 향해 간 정신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는 독일의 소설예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임무를 다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으로 1929년에는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뤼베크의 부유한 곡물상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형 H.만(1871∼1950)과 장남 K.만(1906∼1949)도 모두 작가였다. 189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이 파산, 몰락하여 1893년 가족이 모두 뮌헨으로 이사하였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면서 뮌헨대학에서 미술사·문학사 등을 청강하였으며, 한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79)를 비롯한 육체·정신적 결함으로부터 고독한 행복을 추구하려다가 실패하는 주인공을 취급한 제1기 단편소설집을 발표한 후에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Die Buddenbrook》(1901)을 발표하고, 그 속에 쇼펜하우어의 고뇌하는 의지,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 니체의 의지철학 등의 영향을 더욱더 밝혀 내어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어 《트리스탄 Tristan》(1903)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1903)를 비롯한 제2기 단편집 및 3막극의 희곡 《피오렌처》(1905) 등에서 이미 제1기 단편집 속에서 취급되거나 싹트고 있던 주제를 삶과 죽음, 시민과 예술가, 정신과 삶, 정신과 예술 등의 대립현상 속에서 거듭 추구하고, 그것들의 조화를 꾀하였다. 장편 《태공전하(太公殿下) Königliche Hoheit》(1909)와 단편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1912)은 그 성과의 제1보였고,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12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프랑스의 A.지드가 높이 평가한 대작 《마(魔)의 산 Der Zauberberg》(1924)은 이 기간에 집필이 진행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집필이 일시 중단되었다.

서유럽식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독일 문화를 옹호하는 논문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1918)을 써내어 형 하인리히와 한때 사이가 벌어졌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후에 스스로 고치게 되었지만, 가장 흥미 있는 이와 같은 자기고백적 자기옹호의 논쟁은 소설에 의한 그때까지의 자기추구와 똑같은 것이었으며, 그 후의 정치와의 관련에 대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시민=작가로서의 자기긍정의 태도가 확립되었다. 즉, 정치적 양심에 눈을 뜨게 된 그는 독일제국이 붕괴하고 독일공화국이 탄생하는 현실적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문학적 유럽주의를 정치적·윤리적으로 보강하여, 후에 그 자신이 민주주의적 인류종교라고 이름 붙인 입장(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을 확립해 갔다.

산문 소품 《주인과 개》(1919)와 서사시 《어린이의 노래》(1919)는 논쟁으로부터 창작으로 복귀해 가는 과도기의 작품이지만, 평론 《괴테와 톨스토이》(1922)는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사상권에서 벗어나서 독일 고전주의휴머니즘의 상징인 괴테에 접근해 간 그의 정신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독일공화국에 대하여》(1923)는 그의 민주주의 지지를 성명하는 작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완성된 《마의 산》은 죽음과 과거에만 집착하였던 초기의 우울한 귀족적 의식을 억제하고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랑의 휴머니즘으로 향해 간 정신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때까지의 창작활동에 의하여 독일의 소설예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임무를 다하였다.

그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으로 국내외에 널리 퍼져 간 결과가 되었고, 1929년에는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나치스의 대두를 위험시하고 ‘이성에의 호소’ 등의 정치적 강연 및 많은 평론을 통하여 독일시민계급에게 그 위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발표한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1930)는 국수주의적 독재의 사기술을 폭로한 단편소설이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외강연여행에 나선 그는 그대로 망명생활에 들어가 스위스에 거주하여 독일의 국내사정을 조용히 살피면서 구약성서 중의 《창세기》에서 취재한 4부작 《요셉과 그 형제 Joseph und Seine Bruder》를, 제1권 《야콥 이야기》(1933), 제2권 《젊은 요셉》(1934), 제3권 《이집트의 요셉》(1936), 제4권 《양육인 요셉》(1943) 등으로 발표하였다.

1936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적을 획득하였고, 그 해 독일 국적과 국내재산을 박탈당한데다, 본대학교 철학과에서 받은 명예박사 칭호까지도 철회해 버리자, 다시 침묵을 깨고 본대학에 응수하는 《서간(書簡)》(1937)을 썼으며, 반(反)파시즘 기관지 《척도(尺度)와 가치》(1937∼1939)를 발행하여, 전투적 휴머니즘의 대표자가 되었다. 193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국 내의 14개 도시에서 〈찾아올 민주주의의 승리〉 〈이 평화〉 〈자유의 문제에 대하여〉 등의 강연을 하였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 방송을 통하여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반(反)나치스 정기방송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제1성은 독일인의 성격을 파고든 강연 〈독일과 독일인〉으로 시작되지만, 이미 1900년경에 품고 있던 모티프, 극히 독일적이며 괴테의 대표작으로도 되었던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 예술의 힘을 얻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매우 복잡한 창작기법 속에 수록한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1947)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성 상실의 이야기이지만, 이어서 발표한 《선택받은 사람 Der Erwählte》(1951)은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전설에 의하여 은총의 기적을 주제로 한 인간성 회복을 묘사한 최고 걸작이다. 그는 유럽을 향한 향수를 달래지 못하고 1952년 마침내 스위스의 취리히로 이사하여, 제1작인 단편소설 《속임받은 여인》(1953)을 발표하였다. 1954년에는 그의 생애에 걸친 자기고백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록의 제1부》(1954)를 발표하였는데, 사기꾼의 인생 행로를 통하여 예술 및 예술가의 문제를 추구한 이 작품이 그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다.

그는 또한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탁월하여 문학·예술·철학·정치 등 많은 영역에 걸쳐 우수한 평론과 수필을 많이 남겼다. 평론집으로는 《응답》(1922) 《노력》(1925) 《시대 요구》(1930) 《거장(巨匠)의 고뇌와 위대함》(1935) 《정신의 고귀》(1945) 《신고론집(新古論集)》(1953) 등이 있고, 수필로는 여행기인 《파리 방문기》(1926), 히틀러 타도를 부르짖은 라디오 방송문집 《독일 청취자 여러분》이 있으며, 자서전 및 자작해설적인 것으로 《약전(略傳)》(1930)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1949) 《나의 시대》(1950) 등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5년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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