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로맨티스트

그날 이후 그녀는 내 애인이 되었다.……………(중략)

내가 사랑을 고백하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도 덕훈씨를 좋아해요. 지금은 그래요. 그런데요. 미리 말해 두지만 덕훈 씨만 사랑하게 될 것 같진 않아요."

한 음절이 마음에 걸렸다. 덕훈 씨만 사랑하게 될 것 같진 않아요.

"네?"
"덕훈 씨는 한 사람만 사랑항 자신이 있어요? 여태까지 그래 왔나요?"

듣다보니 조금 이상했다. 그런 말은 주로 바람둥이 남자들이 매달리는 여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야 연애하면서 다른 여자한테 눈이 돌아간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 솔직하시네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시작도 하기전에. 혹은 시작하자마자 연애의 성격을 규정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가 곧 상대방이 생각하는 연애다. 그녀는 달랐다. 이전의 평범함 연애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자는 애긴가요? 언제든지 다른 사람이 생기면 헤어지자고 할 작정이라는 건가요? 미리 알아 두라는 건가요?"
"그거야 누구든 그럴 일이 생기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덕훈 씨를 독점할 생각이 없어요. 덕훈 씨도 나한테 그렇게 대해 줄 수 있나요?"
"아니 그럼, 툭 까놓고 말해서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얘긴가요?"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전적으로 의도한 바대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의도와는 무관하게? 별로 관심이 가는 남자는 아니지만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는 남자가 있다면, 때마침 남자하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같이 자겠다는 얘기인가. 전적으로 의도한 바대로? 같이 자고 싶은 남자가 있다면 무조건 같이 자고야 말겠다는 건가.

"마찬가지로 덕훈 씨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난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서로 간섭하지 않는 사귐을 연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연애는, 내가 했던 연애는 그런게 아니었다. 애인 사이인 남녀가 상대방을 독점하려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부정한 행위다.

"나하고 같이 잔 건 그냥 즐긴 건가요?"
"저도 덕훈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하는 연애치고는 좀 이상하잖아요. 마음대로 해도 된다니, 그런 건 연애가 아니라 그냥 섹스만 하는 사이잖아요. 사람들은 그런 만남을 연애하고 부르진 않아요."
"다른 사람들 생각이 중요해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만나는 거라면 연애라 할 수 있지 않나요? 사랑이 꼭 한가지 모습일 수많은 없잖아요."
"그래도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순 없죠."
"우리가 사랑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것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천 눈에 반해 국경과 인종과 계급을 초월해서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열정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다는 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 사랑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죠."
"그런 낭만적 사랑이 존재하며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건 겨우 2백 년도 되지 않았어요. 그동안 지구상에서 일생을 보낸 수십억 명의 사람들 중 정말 그렇게 산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겨우 2백년? 거야 그렇다 쳐도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걸 허용하는 사라도 있나요?"
"덕훈 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거야 뭐……"

사랑이 뭐지? '눈물의 씨앗'말고 다른게 뭐 있더라.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사랑이란 리얼이고 필링이고 터치지죠.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게 사랑이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사랑이죠."
"그건 존 레논 노래 가사잖아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 노래 가사에 사랑은 자유라고 나오잖아요. 구속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는 거죠."

연애 중일 떄 상대방에게 서로 깊숙이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시점은 정해져 있다.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싫증을 느낀 때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덜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며 상대방이 더 깊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나는 그녀와 애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녀는 나를 섹스 파트너로만 여겼다.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상관없지, 뭐, 남자인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매 경기마다 MOM급의 활약을 펼치는 플레이어니 말이다. 그녀만 한 섹스 파트너는 어디에도 없다.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남자라면 이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못한다. 남자란 운명적으로, 일부러 저지른 다음에 후회를 하게 되어 있다.




올 봄에 나온 박현욱 작가의 소설
상반기에 히트를 친 몇 안되는 소설책 중에 하나.
뒤늦게 접하고 있는데...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 - 내 사고철학 밖의 일을 모두 틀리다고만 할수 없는 일.

윗 부분은 소설의 서두에 남여주인공이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의 장을 전체 발췌한 부분이다.
부분적으로 할려다가...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여서.
소설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지만,
현실에도 이러한 일이 없다고는 말 못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의 틀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미 빈번한 사회적 현상이며 주류가 되어가는 문화적 행태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의 틀 안에서도
발생하는 일이며 우리 사회의 잣대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애매하다.

여러가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발칙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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