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주일만에 하권까지 독파.
당초 생각보다는 오히려 더딘 속도로 하권을 읽었다.
- 중간에 회사일때문에 2~3일 시간을 통 못 내서 그런겐가;;; -

1장. 베네치아의 탄생 → 2장. 바다로! → 3장. 제4차 십자군 → 4장. 베니스의 상인 → 5장. 정치의 기술 → 6장. 라이벌 제노바 → 7장. 베네치아의 여인들로 이어지는 상권이 베네치아의 전성기와 그 전성기를 이끌어 낸 베네치아의 저력에 대한 이야기라면 하권은 베네치아가 이전과 바뀐 환경속에 고군분투하면서 변화해 나가는 과정과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권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8장. 숙적 터키 → 9장. 성지순례 패키지 투어 → 10장. 대항해 시대의 도전 → 11장. 2대 제국 사이의 골짜기에서 → 12장. 지중해 최후의 성채 → 13장. 비발디의 세기 → 14장. 베네치아의 죽음.

위에서도 밝혔지만 상권에서는 주로 해양국가로서 교역으로 국력을 키워나가는 베네치아가 어떤 사고를 가지고 국가를 건설해왔는지에 대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지중해를 자신들의 바다로 만들고 바다의 고속도로를 만들만큼 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베네치아는 하권의 첫 장에 등장하는 터키와의 대립속에 이전과는 다른 환경에 처하기 시작한다. 터키가 등장하기 전 베네치아의 경제력은 정말 대단했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부르크하르트도 인용했던 유명한 '톰마소 모체니고 연설'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원수 모체니고가 죽음의 병상에서 했다는 연설이다. 이 연설문은 숫자를 좋아하는 요즘 장관들이 무색해질 만큼 경제통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 시기 베네치아 지배계급의 정신 구조가 어떠했던가를 나타내고 있어 흥미롭다. 그 내용은 이렇다.

국채는 1천만 두카토였던 것이 600만 두카토로 줄어들었고, 수출 총계는 1천만 두카토에 수입도 거의 동액이며, 여기서 나오는 이익은 400만 두카토에 이른다. 국영 조페창은 해마다 120만 두카토의 금화를 주조하고 은화는 80만 두카토를 주조하여 내보낸다. 금은의 함유량이 일정하기 떄문에 베네치아의 통화는 가장 신용있는 국제통화이기도 하다. 베네치아 내의 가옥의 가치는 700만 두카토를 넘었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 수입은 연간 50만 두카토에 이른다. 법의 평등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 외국인들도 이 나라에서 재판을 받고 싶어할 정도이다.

45척의 대형 갤리선에 1만 1천 명의 선원이 상시 출항할 수 있는 상태에 있고, 300척이 넘는 200암포라(120톤)급 이상의 대형 범선에 8천 명의 선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3천 척에 이르는 40에서 200암포라(24톤에서 120톤)급의 소형 범선에 1만 7천 명이 선원으로 취업해 있다. 조선공은 6천 명을 헤아리며, 비단과 면직물 등의 직물공은 범포를 짜는 공원들을 합쳐 모두 1만 6천 명에 이른다. 연간 수입이 700두카토에서 4천 두카토에 이르는 시민은 1천 명을 헤아린다.(당시에는 집세를 빼고 한해에 15에서 20두카토만 있으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원수 모체니고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래로만 나가면 베네치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용한 전쟁을 피해야 한다. 만약 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태라도 되면 오늘 1만 두카토를 가진 자는 내일 1천 두카토밖에 갖지 않고 집을 두 채 가진 자는 한 채밖에 갖지 않는 것이 된다" 만약에 다른 나라들도 베네치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면 노 원수 모체니고의 비원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의 터키도 밀라노도, 또 16세기에 들어 강국으로 등장하는 에스파냐도 프랑스도.... - 중략 - 육지형 국가였던 것이 베네치아의 불행이었다. - 40~42P

그렇다. 베네치아의 불행은 마치 20세기 초반의 한국 - 지금도 별반 차이는 없지만 - 처럼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정복욕이 강한 국가들이었다는 점이다. 그 첫번째 적이 바로 터키였다. 이전까지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교역에 있어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제노바, 피사 등과 바다의 왕자 자리를 놓고 전쟁을 벌이긴 했지만 이들 국가와의 전쟁은 모두 영토 확장이 아니라 교역의 안전성을 위한 싸움이었다. 때문에 그 목적만 지켜진다면 언제든지 전쟁을 멈추고 다시 교역에 힘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터키를 시작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베네치아의 주변국들은 기본적으로 영토확장이라는 목적을 가진다. 뒤에 나오겠지만 양적인 성장을 통한 질적강화의 노선을 따라가는 국가들인 것이다.

터키와의 반복되는 전쟁속에 바다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주요 지점들을 하나씩 빼앗기기 시작한 베네치아는 교역에 의한 경제력 확보가 과거처럼 뛰어난 실적을 거두지 못할지라도 다른 방법들을 통해 경제력의 만회를 꾀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9장에 소개된 성지순례 패키지 여행이다. 15세기에 이미 베네치아는 현재 그 도시가 그러하듯이 관광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지금은 도시 자체가 관광의 목적지이지만 당시에는 거쳐가는 곳이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최종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베네치아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지금보다 더 유력한 관광지임에 틀림없다. 모든 가치판단을 경제적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베네치아인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찾아온 외국인들이 아무생각없이 베네치아를 거쳐가도록 두었을리 만무하다. 베네치아인들의 철저함은 책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산 마르코 광장, 리알토 다리 근처, 스키아보니 선착장 등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들이 첫 발을 들여놓음직한 곳에는 두 남자씩 짝을 지어 패트롤을 도는 것을 볼 수 있다. '트로마리오'라고 불리는 사내들로 이들은 경찰관이 아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무원인 이들은 외국인 가운데서도 순례자들을 전문으로 대하는 관광요원이라고나 할까. - 중략 - 그래서 트로마리오들은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보면 다가가서 정중히 말은 건다.

"저희들이 뭔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들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3개국 말이 다 통하도록 짜여 있었다.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 이 세 나라에서 오는 순례자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순례자들이 첫째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숙소를 정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들 트로마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호텔 예약 같은 제도가 없었던 시대의 일이다. 트로마리오들은 재빨리 눈알을 굴려 순례꾼들의 주머니 사정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터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숙박비로 얼마나 쓸 수 있는가를 묻는다. 대답의 내용에 따라 데리고 갈 곳을 정하는 것이다. - 중략 -

소개받은 곳으로 가서 베네치아에서의 첫날밤은 코가 비틀어지게 자고 난 순례자는 다음날 아침에 생각지도 않았던 방문객을 맞고는 깜짝 놀란다. 어제의 그 트로마리오가 이번엔 혼자서, 물론 순례자가 영국인이면 영어를 지껄일 줄 아는 쪽이 방에 들어서면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시겠다면 쇼핑을 거두어드리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이것은 최고급 호텔의 독방에서 잔 사람이나 수도원의 큰 홀 같은 방의 나무침대에서 잔 순례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 - 중략 -

순례자들이 이런저런 물건들을 모두 사들였지만 배가 출범할 때까지 그 물건들을 어디다 둘 것인가를 가지고 낭패를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출항 날짜가 확정되었을때 그것을 가게에 알리면 가게 주인이 부두까지 갖다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정부의 엄한 감시의 눈이 번득이고 있기 때문에 이들 점포가 불량품을 팔거나 바가지를 씌울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부정행위를 당하면 순례자들은 순례자 재판 전담소에 제소할 수 있다. 트로마리오들도 호텔이나 상점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베네치아공화국의 법률은 국가공무원의 독직과 수뢰에 대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 137~142P

이 얼마나 철저한가. 전혀 모르는 낯선 땅에...그것도 오늘날처럼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예약 가능하거나 혹은 여행사에서 대부분 스케줄을 잡아주는 시대에도 이렇게 편리하게 여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베네치아는 이미 15세기부터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말그대로 자기가 가진 돈을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거다. 가진 돈이 적다고 구박하거나 쫓아내지도 않는다. 부자던 가난한 사람이던 똑같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니 어떤 사람이 다른 도시를 경우해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를 가려고 하겠는가. 만약 내가 그 시대에 베네치아에 갔더라면 없는 돈도 빌려서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베네치아도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환경속으로 접어든다. 이제 지중해는 더 이상 모든 교역의 중심지가 아닌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면서 에스파냐가 새로운 바다의 왕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곧 이어서는 포르투갈까지 베네치아를 위협할만큼 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대항해시대에 포기해야할 상품들을 빨리 버리고 새로운 상품을 발굴해 오리엔트와 서유럽을 연결하는 최고의 무역국가로소의 입지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주제 국가들이 대두하기 시작하는 16세기에 베네치아를 둘러싼 세계는 또 변화한다. 그 변화는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아래와 같은 말과 함께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강국이란 전쟁이건 평화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베네치아공화국은 이제는 이미 그런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외교관 프란체스코 소란초는 귀임후의 보고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제의 면에서는 타고난 상재와 조지적 운영으로 대항해 시대의 도전에 대응해 나갈 수 있었던 베네치아도 정치와 군사의 면에서는 일이 자기들의 의욕과는 관계없는 곳에서 진행되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에 몰려 있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다소 난폭한 분석을 감히 해본다면, 중세 르네상스의 꽃이던 도시국가는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두지 않고 교역을 무기로 번영에 이르렀다는 점을 보더라도 "양"보다는 "질"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해도 안될 것도 없을 듯하다. 도시국가의 주민 1인당 생산성은 대단히 높아서 인구가 10만에서 20만 미만이면서 베네치아공화국의 세입은 인구 1,600만인 터키의 그것과 거의 같았고, 한때는 프랑스나 영국의 왕들이 피렌체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지 않고서는 전쟁 하나 치러낼 수가 없았다. - 중략-

그러나 '양형'의 국가가 그 힘을 활용하는 일에 눈을 뜨면 무서운 존재가 된다. 이들 나라는 하나같이 군주제 국가였으므로 유능한 군주를 얻기만 하면 급속히 진전된다. 16세기를 근대국가 대두의 시대로 보는 것은 이 시대에 이들 나라에 전례없이 유능한 군주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 281P

군주제 국가의 성장. 이는 곧 베네치아를 둘러산 나라들 중 본국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양적인 성장을 활용할 줄 아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군주제 국가들은 대항해시대에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그 땅을 식민지로 삼아버려 원주민은 노예로 부리고 그 땅의 천연자원으로 수입자체를 줄여나가니 당연히 베네치아공화국이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이후 베네치아는 에스파냐 왕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카를로스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만들어낸 에스파냐 제국와 이전부터 제1의 적이었던 터키의 2대 제국 사이에서의 고난을 시작으로 근 한 세기를 전쟁만 하면서 보내게 된다. 그때마다 베네치아의 외교력이 빛을 발하면 멸망의 위기는 넘겼지만 18세기 예술적으로 맞이하는 전성기를 끝으로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18세기 말인 1797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의 멸망을 자연사에 비유한다. 그러한 의견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 1천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몇 번인가 서유럽 사람들에게 '신화'를 보여준 나리이다. 상승기에는 나라의 독립에 대한 집착이, 이어서 최성기에는 정치와 외교의 능란함이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베네치아는 끝없는 쾌락의 도시라는 인상을 동시대 서유럽인들에게 심어줬을 것이다. 이런 신화들은 아마도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코로 카사노바나 그밖에 북쪽에서 온 길손들이 써남긴 기록들을 읽어보아도 18세기 베네치아의 쾌락 이후 다가올 붕괴를 앞둔 고뇌에 찬 초조의 분출이나 자기파괴적인 방일함은 어디서도 느낄 수가 없다. 그보다는 어느 시대이고 반드시 조금은 있게 마련인 경박성이 지배적이었다는 인상밖에 받지 않는다.

영고성쇠가 역사의 순리라면 하다못해 이 베네치아처럼 우아하게 쇠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베네치아가 그같이 우아하게 쇠할 수 있었던 것은 베네치아의 죽음이 병고와 시련을 여러차례 극복해온 끝에 자연사를 맞는 인간의 죽음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 49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