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현의 노래'에서는 우륵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김훈작가가 남한산성에서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수 있을만한 인물은 없다.
아직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그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해 그 작품들과의 비교도 개인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칼의 노래'가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며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드러난 리더십을 제시하고 있다는 서평과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된 소설의 흐름속에 이순신 장군 자신의 1인칭 서술로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람들의 리뷰만을 알 뿐.
이에 반해 '현의 노래'는 무너져가는 가야의 열두고을을 금이라는 악기에 담았던 우륵. 멸망해 가는 가야의 운명앞에 권력과 강철이라는 무기에 의지하려는 왕과 관료에 비해 덧없는 세상에서 소리의 영원성을 믿었던 우륵의 이야기라는 후기라고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순신과 우륵이라는 주인공이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남한산성'에서는 딱히 주인공이 없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시대적 배경속에 강화도 까지도 가지못해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가야했던 인조와 그의 신하들 김류, 최명길, 김상헌. 그리고 서날쇠로 대변되는 당시의 민중들. 이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임진왜란을 거쳐 피페해진 조선이 다시 기력을 되찾기도 전에 발생한 병자호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여전히 망해가는 명나라에만 호의적인 조선에 강경한 대응을 하면서 시작된 전쟁. 당시 조선은 주화파에 비해 주전파(척화파)가 대세였기에 청나라의 요구를 무시했고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갔던 전쟁이다.
10만의 대군앞에 몇천의 군사도 없이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걸어잠군 48일간의 기록이 바로 소설 남한산성이다. 결국 역사에서처럼 인조가 48일만에 성문을 열고 스스로 걸어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나 태종에게 3번 절하고 9번 고개를 숙이는 치욕을 마지막으로 소설도 끝을 맺는다. 우리가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흔히 배웠던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사건.
남한산성속에 같힌 조선왕조의 현실. 그 모습이 김훈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사실이 아닐까? 강산은 피페해가고 아무런 죄도 없이 임금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생계수단을 봉쇄당하고 이유없이 죽어가는 백성들과 무관하게 주화파의 대표주자인 최명길과 주전파의 대표주자인 김상헌은 인조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갈등을 발생시킨다. 영의정인 김류는 유유부단의 극치. 어려운 결정은 모두 왕이나 다른 신하에게 넘기고 시덥지않은 이유로 병졸과 당하관들만 괴롭힌다. 이런 모든 현상들 속에 오히려 유일하게 소설속에 기명으로 등장하는 천민 서날쇠가 더 대단해보인다.
병자호란은 한국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쇠약해진 조선에 찬불을 끼얹어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을 연 전쟁인 동시에 주전파와 주화파로 시작된 개방과 페쇄의 갈등이 결국 조선말 수구파와 개혁파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이후 9년동안이나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있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9년 만에 귀국해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인조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우리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이덕일씨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볼모시절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청나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 개화파의 선두주자로 꼽히면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 합방이 이루어질때까지 수구파가 대세인 나라가 되어버렸다는 판단이 많다.
어찌되었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조선이라는 나라도. 최명길이나 김상헌으로 대변되는 주화파와 주전파도 아닌 남한산성 그 자체와 그곳의 백성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김훈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보면 좀 더 느낌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한산성에서의 48일(책에서 발췌한 것이라 내용이 꽤 깁니다)이 궁금하신 분은
남한산성, 겨울에서 봄으로 1636년 12월 14일~1637년 2월 2일
인조 14년(1636년) 병자 12월 14일(이하 모두 음력) -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하기로 하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함께 빈궁을 강화도로 보내다.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강화를 청하여 진격을 늦추도록 하다. 임금이 수구문으로 나가 남한산성에 도착하다. 김류가 임금에게 강화도로 피할 것을 권하다. 12월 15일 - 임금이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향하다가 성으로 돌아오다.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전하다. 임금이 수어사 이시백의 청에 따라 제찰사 이하 모든 장수를 불러 유시하다. 눈이 많이 내리고 유성이 나타나다. 12월 16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성첩을 순시하고 사졸을 위로하다. 유성이 나타나다. 12월 17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류와 홍서붕이 강화를 청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회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12월 18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상헌, 장유, 윤휘를 비국당상으로 삼다. 12월 19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적병이 남벽에 육박하자 화포로 물리치다. 12월 20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오랑캐 사신 세 명이 성 밖에 도착하다. 임금이 각 도의 굼대를 선발해 적을 치게 하라고 명하다. 12월 21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김신국, 이경직 등이 오랑캐 진영에서 돌아와 사정을 아뢰다. 12월 22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삼사가 주화를 내세운 사람을 참하도록 청하다. 12월 23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자모군 등이 출전하여 오십 명 가까운 적을 죽이다. 12월 24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를 치르다.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임금이 세자와 승지, 사관을 거느리고 날씨가 개기를 빌다. 12월 25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예조가 온조 사당에 제새를 지내자고 아뢰다. 12월 26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병사를 거느리고 검단산에 도착했으나 습격을 받고 패하다. 12월 27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이기남이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오랑캐 진영에 가지고 가서 전했으나 받지 않다. 12월 28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최명길이 강화에 대해 아뢰다. 선전관 민진익이 성 밖으로 나가 각지의 군중에 명을 전하고 돌아오다. 임금이 입은 옷을 벗어 그에게 내리다. 12월 29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진을 쳤는데 적이 싸우지 않다. 날이 저물 무렵 적이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 등 여덟 명이 죽고 사졸의 사상자도 매우 많다. 12월 30일 -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간관이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 인조 15년(1637년) 정축 1월 1일 - 임금이 남한산성 행궁에 있다. 백관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다. 비국낭청 위산보를 파견하여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고 형세를 엿보게 했으나,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며 되돌려보내다. 일식이 있다. 삶은 고기와 찐 콩을 성첩의 장돌에게 내리도록 명하다. 1월 2일 - 홍서붕, 김진국, 이경직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칸의 글을 받아 오다. 이성구가 장유, 최명길, 이식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할 것을 청하다. 완풍부원군 이서가 군중에서 죽다. 1월 3일 - 동양위 신익성이 오랑캐의 글을 태워 버리자고 상소하다. 홍서붕. 김신국, 이경직 등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들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다. 1월 4일 - 김상헌이 "오랑캐에게 답서를 보내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한 뜻으로 싸우고 지키는 데 대비해야 한다"고 아뢰고, 사간 이명웅, 교리 윤집, 정언 김중일, 수찬 이상형 등이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아뢰다. 선전관 민진익이 여러 진의 근왕병들에게 조정의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여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 세 번이나 나갔다 들어오다. 1월 5일 - 자원 출전한 김사호가 성 밖을 순찰하다 도망하는 군사를 붙잡아 효시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광교산에 주둔하며 전황을 알리다. 1월 6일 - 함경 감사 민성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원도 금화현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들어오다. 사방에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다. 1월 7일 - 임금이 성첩을 지키는 장졸을 위로하다. 1월 8일 -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계책을 묻다. 관량사 나만갑이 남은 군량미가 이천팔백여 석이라고 아뢰다. 예조가 "날짜를 다시 받아 온조왕의 제사를 정성껏 치르자."고 청하다. 1월 9일 - 김류, 홍서붕,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 문서를 오랑캐 진영에 전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사신 파견을 반대하다. 1월 10일. 기록없음 1월 11일 - 해가 뜰 무렵, 임금이 원종대왕의 영정에 제사를 지내다. 김류, 홍서붕, 최명길 등이 글을 보낼 것을 굳이 청해 임금이 열람하고 고칠 곳을 묻다. 최명길이 문장의 자구를 고치다. 푸르고 흰 구름 한 가닥이 동방에서 일어나다. 1월 12일. 기록없음 1월 13일 - 홍서붕이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고 강화를 하자는 의견이 있다"고 하자 임금이 비밀리에 정명수에게 은 일천 냥을,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삼천 냥씩 주게 하다. 임금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고 장사들을 위로하다. 동풍이 크게 불다. 헌릉에 불이 나 사흘 동안 화염이 끊이지 않다. 1월 14일 -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다. 1월 15일 - 남병사 서우신과 함경 강사 민성휘가 군사를 합쳐 양근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이만 삼천이라고 일컬어지다. 평안도 별장이 팔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에 도착하다. 경상 좌병사 허완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에 도착했으나 싸우지도 못한 채 패하고, 우병사 민영을 싸우다가 죽었다. 충청 감사 정세규가 용인의 험천에 진을 쳤으나 패하여 생사를 모르다. 1월 16일 - 오랑캐가 '초항'이라는 두 글자를 기폭에 써서 보이다. 용골대가 홍서붕, 윤휘, 최명길에게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하다. 1월 17일 - 홍서붕 등이 무릎을 꿇고 칸의 글을 받아 돌아오다. 그 글에 "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보면 하늘이 자연 처분을 내릴 것"이라고 씌어있다. 1월 18일 - 임금이 적진에 보낼 문서를 읽고 최명길에게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하게 하다. 최명길이 수정한 글을 보고 예조판서 김상헌이 통곡하며 찢어버리고 "먼저 신을 죽이고 다시 깊이 생각하라"고 아뢰다. 김상헌의 말뜻이 간절하고 측은해 세자가 임금 곁에서 목 놓아 울다. 눈이 크게 오다. 1월 19일 -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다. 우상 이홍주와 최명길, 윤휘를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아 죽은 자가 생기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다. 정온이 문서에 '신'이라 언급한 것을 들어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을 만들려 한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린다. 1월 20일 - 대사헌 김수혀느 집의 채유후, 장령 임담, 황일호 등이 청대하여 "국서에 신이라고 일컬으면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된다."고 아뢰다. 최명길이 "늦추는 것은 빨리 일컫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다. 이홍주 등이 지난번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답서를 받아 오다. 그 글에 "그대가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화친을 배척한 신하 두세 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1월 21일 - 이홍주 등이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우리가 다스리도록 결재해 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들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다. 저녁에 용골대가 서문 밖에서 국서를 돌려주며 "그대 나라가 답한 것은 황제의 글 내용과 달라 받지 않는다"고 말하다. 1월 22일 - 최명길이 "다시 문서를 작성해 화답하자"고 아뢰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자수하도록 하다. 세자가 봉서를 비국에 보내어 "죽더라도 내가 성에게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화도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치다. 오랑캐 장수 구왕이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갑곶진에 주둔하면서 홍이포를 발사하자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접근하지 못하고,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화도로 건너오다. 전 우의정 김상용이 죽다.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유사와 부녀 중에 자결한 자와 굴복하지 않고 죽은 자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월 23일 - 김상헌이 적진에 나가가 죽게 해줄 것을 청하다. 밤중에 적이 서쪽에 육박하자 수어사 이시백이 힘을 다해 싸워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가다. 전 교리 윤집, 전 수찬 오달제가 척화신으로 오랑캐의 칼날을 받겠다고 상소하다. 1월 24일 - 적이 망월봉에서 발사한 포탄이 행궁으로 떨어지다. 1월 25일 -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고 성첩이 탄환에 맞아 허물어져 군사들이 마음이 흉흉하다. 용골대와 마무대가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진은 다시 오지 말라"고 하며 그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준다. 1월 26일 - 훈련도감의 장졸과 어영청의 군병이 대궐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청하다. 이때 처음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임금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삼사가 통곡하며 출성을 만류하자 임금이 "군정이 변했고 사태도 달라졌다. 나의 자부들이 모두 잡혔고 백관의 족속들도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혼자 산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보겠는가"라고 말하다. 1월 27일 - 이홍주, 김신국, 최명길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다. 그 글에서 "조지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하다. 1월 28일 - 문서를 거두어 모두 태우다. 정온이 칼로 스스로 배를 찌르고, 김상헌이 목을 맸으나 죽지 않다. 1월 29일 - 윤집, 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자 임금이 오열하며 술을 내리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 진영에 가다. 1월 30일 - 삼전도에서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다. 임금이 밭 한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리다 해질 무렵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다.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백관들이 앞 다투어 어의를 잡아 당기며 배에 오르다. 사로잡힌 부녀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다. 인정 떄가 되어 창경궁 양화당으로 들어가다. 2월 1일 - 몽고병들이 남한산성 안에 있었는데. 살림집이 대부분 불타고 시체가 길거리에 널리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임금에게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나와서 전송하라"고 요청하다. 왕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은 청나라 진중에 머물고 인평대군과 부인은 돌아오다. 2월 2일 - 칸이 삼전도에서 철군하자 임금이 전곶장에 나가 전송하다.
★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중에서 「인조실록」부분을 짧게 정리한 것입니다.(372P~3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