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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new/beijing/read.nhn?ctg=photoNews&oid=307&aid=0000000044

‘라디오’는 장애인에 대한 영화이자 스포츠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장애인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통 혹은 교감에 관한 이야기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 그리고 교감.

사랑과 믿음 혹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꽤 많은 가치들의 시작은 대부분 관심과 소통이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열기 전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놀라기도 한다. 영화 ‘라디오’가 장애에 대해서, 소통과 교감에 대해서 보여주는 영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세상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라디오’라는 별명을 가진 장애청년 제임스 로버트 케네디는 어느날 한나고등학교 미식축구팀 감독 해롤드 존스를 만난다. 입을 열지 않던 라디오는 존스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라디오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교감을 하면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나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명예감독이 된다.

단순한 이야기고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재미 끝에 묻어나는 감동이 제법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는 문구도 영화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 한몫한다. 의지와 따뜻함이 밴 눈빛이 인상적인 애드 해리스와 심한 장애는 아니지만 순간순간 무의식적 동작까지 장애인의 동작을 연기해내는 쿠바 구딩 주니어의 연기도 좋다. 한마디로 볼만하다.

미식축구는 존스와 라디오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라디오는 미식축구팀의 허드렛일을 하고 응원을 하면서 마음을 열어간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날, 팀은 원정경기를 떠나고 존스는 라디오를 데리고 가려 하지만 학부모의 반대로 라디오만 어두운 운동장에 남기고 떠난다. 라디오는 텅 빈 운동장에서 장대비를 맞으며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혼자 미식축구를 한다.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볼만하다는 평가를 넘어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은 따로 있다. 가끔 낄낄대며 웃게 만든다거나 때로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몇몇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존스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해서요.”

라디오의 어머니는 존스에게 “왜 우리 아이에게 잘 대해 주느냐”고 묻는다. 대부분의 약자들이 보이는 약간의 경계성을 띄면서 말이다. 위의 인용문은 존스의 답이다. 간단한 대답이지만 쉬운 대답은 아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도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가르쳤어요.”

많이 들어 익숙한 대사다. 구구절절하게 생색을 내는 것보다 훨씬 근사하지만, 감각적인 카피처럼 다가오는 말. 하지만 ‘라디오’에서는 다르다. 머릿속에 맴돌던 대사의 감칠맛의 이유를 명확하게 짚어내기 때문이다.

“그(라디오)가 우리를 대한 방식은, 우리가 늘 서로에게 기대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교훈적이고 감동적이었던 앞의 카피는 이 대사의 등장과 함께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장을 전한다. 아무런 의도나 계산 혹은 동정심 없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선 것은 라디오가 먼저였다. 이쯤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사람들은 소통을 이야기하고 관심과 사랑을 말한다. 소통하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기대하지만 스스로 다른 이에게 먼저 행하거나 베풀지는 않는다. 많은 현실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서로 자신의 자리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아가자. 영화를 보고 나서 예전에 장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느꼈던 거리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이에게 느껴지는 일종의 거부감이었나 보다. 지금의 나는 또 우리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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