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회사 선배&동료들과 홍콩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주윤발...장국영...으로 대변되던 홍콩 느와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같이 있던 한 선배가 <무간도>시리즈를 강추...
얼마전 본 '연인'에서의 유독화는 너무했다 싶었지만
무간도에서 그는 제 역활을 톡톡히 해낸듯...
고등학교 시절 김용의 역사소설 '영웅문'의 3부인
'의천도룡기' 20편 장편 비디오에서 처음 접했던
양조위는 여전히 매력이 철철...(참 좋다)
영화 초반에 빠른 스토리와 화면 전개로 다소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새벽시간이 주는 집중력은 이럴때 참 고맙다^^
홍콩 경찰의 비밀 요원인 진영인(양조위 분).
경찰학교에서 훈련을 받다가 발탁된 그는
범죄 조직 '삼합회'에 잠입하여 위장 스파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느새 삼합회 보스 한침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삼합회'의 숨은 조직원 유건명(유덕화 분).
18살 때부터 경찰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
현재 경찰 내에서 가장 뛰어난 강력반 요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진영인과 유건명은 '삼합회' 보스의 범죄를 캐내는
대대적인 작전 중에 서로의 존재를 감지한다.
무간도는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부처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사이없이 쭉 이어간다는 뜻이란다.
무간도는 지옥의 최저 층이다. 지옥의 18층 중에 무간도는 바로 마지막 층이다.
일단 무간도에 들어가면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살아갈 기회도 없고
그래서 무간도란 바로 "지옥의 지옥"이다.
경찰과 조직원의 신분을 숨기고 상대방 진영에 잡입해 10년.
그들에게 그 생활은 무간도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초반 양조위와 유덕화가 서로의 신분을 모르고
같이 들었던 음악이 기억에 남는다...
둘을 첨 이어주기도 하고
둘이 상대를 인지하고 등을 돌릴때도 등장했던 음악...
프롤로그
없을무 사이간 길도. 불교에서 말하는 18층 지옥중 제일 아래인 무간지옥을 일컫는 말이다. 비장미 어린 <무간도>의 오픈 크레딧에서 차용하는 불교 개념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비극의 적극적인 복선을 함축하는 하나의 대전제로써 자리한다. 선한 눈매에 어린 그늘진 주름이 선명한 진영인과 야무지지만 냉정한 애상의 잔영이 드리워진 유건명. 숙명적으로 두 사람은 제목 그대로 서로의 사이조차 용인될 수 없는 가혹한 인연이었다. 만나선 안 될 두 사내가 어찌할 수 없을 교차로 인해 고단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던 심각한 스토리는 그것이 비록 근원 없는 비장미의 대책 없는 강조라 할지라도 상당한 흡인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생의 십자가를 타고난 이들의 이야기를 두고 사람들은 형체조차 희미해졌던 홍콩 느와르의 강력한 부활탄이라며 거창한 면류관을 부여했다. <무간도>의 아우라는 상당했다. 만만찮은 진통을 겪고 창조되어 하나의 전설이 된 <대부>시리즈처럼 <무간도>의 제작진들은 전편의 아우라를 계승시킬 두 편의 후속타를 연이어 탄생시켰다. <무간도 II - 혼돈의 시대(이하 혼돈의 시대)>는 ‘무간도전전(無間道前傳)’이라는 원제 그대로 <무간도>에서 축약되었던 진영인과 유건명의 이전 내력을 읊어주는 정직한 연속선이다. 마칠종자(終)와 절정극자(極)를 차용한 <무간도 III - 종극무간(이하 종극무간)>은 그간의 계보를 절정에서 마무리하고자 하는 최대의 비장미에의 의지를 전면에 내세운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무간도>, 그 오리지널의 미덕
내일은 끝없이 멀기만 한데 하지만 영원처럼 먼 것은 없다는 동명의 주제가 가사처럼 <무간도>는 진영인의 죽음 뒤에도 이어졌다. 이처럼 <무간도>가 길어진 까닭에는 본편의 저력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무간도>는 <혼돈의 시대>와 <종극무간>의 형이요, 부모이자 바이블이다. <무간도>가 가진 흥행성의 외적 요소는 보는 이로 자연스러운 집중력을 발휘케 했던 템포의 조율이다. 즉, 전개는 빠르되 그 묘사는 세세했다는 점이다.
속도감 있는 내러티브의 전개와 적절히 비중을 같이 하는 심리 묘사, 그리고 그러한 심리 묘사에 적잖은 공감을 자아내는 빼어난 캐스팅과 그에 부합하는 간결하고도 무게감 있는 대사는 <무간도>의 흥행 포인트를 이루는 데 하나로 수렴되었다. 진영인의 “난 경찰이야”와 유건명의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대사는 삶 자체가 무간일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처지를 환기시키는 각인 효과를 창출한다. 채금의 ‘피유망적시광’과 오디오, 모르스 부호 등의 <무간도>만의 국지적 코드는 영인과 건명의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개와 심리 묘사 양자간의 가교 역할을 한다. 옥상이라는 공간 또한 내밀한 속마음을 표현하게끔 하는 장(場)으로써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무간도>는 사건과 액션이 주가 되지 않는 느와르 영화다. 검찰과 범죄 현장이라는 상반된 공간은 각자가 푸른 계열의 톤과 초록색 톤으로 대비된다.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줄거리를 표현하는 행동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미세함을 아우르는 데 치중한다. 갈등하는 영인과 건명의 마음을 대변하는 양 카메라의 움직임은 다분히 흐느적대고 의식적인 미동을 동반한다. 모던하고 섬세한 두가풍의 촬영과 대니팽의 편집은 <무간도>에 퓨전 느와르적 색채를 부여한다. 남성이 주가 되는 정황과 다분히 겉멋을 추구하는 의도를 염두에 두는 흐름에서는 기존 홍콩 느와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나, 그 표현에서 제법 신선한 국지적 코드의 배치와 등장인물의 내면의 전개에의 세세한 배려-그들이 액션 연기보다 표정과 내면 연기에 치중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가 돋보인다.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의 계보에서 청출어람격의 변주된 느와르 형태를 취한다.
<무간도>는 관객들에게 관음증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경찰이자 조직인 영인과 조직이자 경찰인 건명의 양자 구도는 영화와 관객과의 약속이다. 다른 극 속 주변 인물들은 관객들 앞에서 마피아 게임을 벌인다. 그들은 모르고 영인과 건명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으며 관객은 알고 있다는 묘한 삼자간의 설정은 꽤나 흥미로운 게임의 스타트 전제가 된다. 주변인물들이 관객들만큼 알아가기까지의 과정, 즉 게임셋으로 치닫는 과정은, 그래서 쏠쏠한 긴장감을 생산한다. 메리(정수문)는 자신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가진 28개의 인격을 일일이 알지 못하지만 전후 사정에 훤한 관객은 이미 친절하게도 정보를 제공받았기에 제 나름의 깜냥을 발휘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전편의 배다른 계승, <무간도 II - 혼돈의 시대>
배다른 형이 삼합회의 보스임이 알려지면서 경찰 학교에서 퇴교 조치를 받게 된 어린 영인에게 황국장은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 영인의 대답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후에 그는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영인이나 건명이나 스스로를 규정짓고자 하는 지향점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영인의 이 한마디는 그가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시발점이다. <혼돈의 시대>는 그들이 무간지옥에 완전히 발을 들이밀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전편이 표방하는 로망의 원류로의 고찰적 성격을 띠는 <혼돈의 시대>는 그래서 그 결말이 마침표가 아닌 하나의 쉼표로 매겨져 있다. 전편에의 캐릭터는 물론, 국지적 코드까지 남김없이 빌려와 하나 하나 풀어놓는 <혼돈의 시대>는 다소 설명적인 성격을 띤다.
<무간도>의 세 작품은 그 유대가 상당히 긴밀하다. 그만큼 작품간의 공생관계가 공고하다는 의미이다. <혼돈의 시대>는 <무간도>의 계승적 성격을 전제로 삼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격이다. 그러나 <혼돈의 시대>가 ‘이제 와서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는 후일담’에 그치지 않은 까닭은 전편의 진가를 빌려와 창조적 모방을 꾀했다는 데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과 관계의 전개 속에서 <혼돈의 시대>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만큼의 썰을 풀어 놓고 있다. 단순한 규명이 아니기 위해 <혼돈의 시대>는 이란성 쌍둥이꼴의 로망을 취하고자 한다. 그래서 <혼돈의 시대>는 <무간도>의 아슬아슬한 계승이자 선이 다른 노선을 의도하는 배다른 작품이다.
<혼돈의 시대>는 사건에 치중한다. 그러나 극중 인물의 내면을 아우르는 묘사 또한 잊지 않는다. 메리(유가령)를 보내기 싫었던 어린 건명은 역시 그 다운-전편의 건명을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선택을 한다. 그리고는 축축해진 눈빛으로 메리에게 전화를 거는 어린 건명의 안면 근육이 나타내는 미동은 미세한 감정선을 그려낸다. 한침은 아내 메리의 위험을 감지하고 적이라 할 수 있을 생면부지의 태국인에게 죽음을 각오한 배짱을 부린다. 보스인 예영효의 배신으로 절박한 변심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한침의 과도기적 심리의 추이는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상승효과를 그려내며 주연들의 그것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주연 못지 않은 조연들
두 사내를 둘러 싼 무간의 가장자리를 배회해야 했던 주변 인물들의 내공은 영인과 건명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양조위(진영인)와 유덕화(유건명)는 이전 자신의 자화상을 어느 정도 차용한 흔적이 보인다. 황추생(황국장)과 증지위(한침)의 무게감은 앞의 두 사내보다 신선함에서는 한 수 위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냉철한 사고를 지향하는 천생 형사로써의 황국장의 면면을 황추생은 맞춤옷처럼 연기한다. 증지위는 결단력 있는 보스 한침의 카리스마를 모자람 없이 드러내고 있다. 또한 증지위는 <혼돈의 시대>에서도 타 인물들에 비해 뛰어난 연기로 한침의 100%를 전달한다. 주연만큼이나 인상적인 이들과 두 사내의 앙상블은 <무간도>와 <혼돈의 시대>가 가지는 흡인력을 배가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인과 건명의 청년 시절을 연기한 여문락과 진관희도 양조위와 유덕화와의 싱크로율에서 합격점을 받을 만 하다. 연륜에서 오는 숙련된 깊이에서는 여물지 못한 면이 있으나 여문락과 진관희는 젊은 두 사내의 면면을 서투르지만 제법 신선하게 모방한다(<무간도>의 경찰 학교 재학 부분에서 진관희와 유덕화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장면의 메이킹을 보면, 감독이 유덕화에게 ‘진관희처럼 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돈의 시대>에서 여문락이 마약을 테스팅하는 장면을 보면 <무간도>에서 양조위가 행했던 동일한 행동이 연상되고 진관희의 사뭇 진지한 눈빛은 유덕화의 메마른 단호함과 매치를 이룬다. 편편에만 출연했던 오진우(예영효)와 유가령(메리) 또한 전형적이긴 해도 숙련된 연기로 주어진 캐릭터를 살려냈다. 호군(육국장)과 두문택(사강)의 연기도 든든한 감초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들
<무간도>에서 구현된 극대화된 로망은 일종의 양날의 검이다. 그 로망의 뒷면은 과도한 남발에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무간도>시리즈는 ‘너무 많이 보여주는’ 영화다. 이런 저런 자근자근한 코드까지 모두 설명해주어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듯, 영화는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 부릴 수 있는 감정선은 모두 다 담아내려는 욕심을 부린다. 영화 자체가 구현에 몰입한 나머지 <무간도>에는 절제의 미학이 없다. 그렇기에 영화는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것이 게임에 이기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내러티브의 꽉 차인 논리를 조금 뒤로 하고서라도 <무간도>시리즈는 신파적인 로망을 우위에 둔다. 그러므로 두 주요인물 만큼이나 황국장과 한침 또한 나름의 정서적 설득력-배역으로써의 카리스마로 대변되는-을 지녀야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무간도>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무간지옥에 이미 들어서있는 상황의 효율적 부각이다(그들이 왜 무간지옥에 빠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영화조차도 설명할 길이 없다. 영화는 그 연유를 굳어 들추지 않고 조용히 묻어둔다. 그러지 않는 편이 더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연유는 건너뛰데 그것은 결코 여백의 미로써 승화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꽉 짜여진 이야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무간도>시리즈에는 2라운드가 존재한다. 주축이 되는 사건 뒤의 만연체의 설명이 뒤따른다. 말미에는 어김없이 희생자들이 묻힌 국립묘지에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대사들을 약속이라도 한 마냥 늘어놓는다. 절제보다는 표현을 여백보다는 채움을 지향하는 <무간도>의 기본 노선은 때로는 군더더기식의 감상적 잉여분을 남기기도 한다. <무간도>는 체감효용의 법칙-비극적 정황의 강조는 도수가 늘어갈 수록 그 약발이 떨어질 수 있다-에 관심이 없다. 어느 정도의 기본 정서가 드러내는 감정의 적정선을 조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효용이 0이 될 때까지 수렴에 수렴을 거듭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간도>의 제 2라운드격인 거나한 후일담은 관객에게 음미의 여지를 걷어가 버린다. 조금만 자제했더라면 극점에서 최대의 로망을 이끌어냈을지도 모를 일인데, <무간도>는 흥미롭지만 독특한 가치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무간도>는 지나치게 정직한 영화다(이는 말미에 가미되는 숨겨진 반전과는 다른 차원이다). 영화는 주어진 전제와 예정된 결말에 한 치의 비껴감도 없이 부합되고자 한다. 때문에 황국장이나 육국장 혹은 메리의 죽음은 영화 전개상 어쩔 수 없는 줄기적 인과 관계에서 기인하는 이벤트들이다(마치 <대장금>에서 한상궁이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의 전개는 자못 감정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전개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하는 이들의 죽음의 순간에는 -다분히 슬픈 감정의 고양을 염두에 둔-나직하고 슬픈 허밍이 흐른다. 심각한 비장미로 장식되는 이들의 죽음은 (애석하게도) 영화의 전개를 위한 전개라는 작위성을 가지기에 그리 신선하다고 볼 수 없다(주연에 가까운 인물들의 죽음으로 인한 신파적 정서의 배가는 이미 <영웅본색>의 소마와 <영웅본색2>의 송자걸이 보여줄 만큼 보여주지 않았나).
여하간 그들은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 죽어야 했고, 또한 곱게 죽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몇몇 이벤트들의 앞 뒤 정황은 그 당위성에서 의심되는 구석이 보인다. <무간도>에서 유건명이 진영인의 파일을 영구 삭제하고도 자기 컴퓨터에 (쥐도 새도 관객도 모르게) 백업해놓은 상황과 <혼돈의 시대>에서 정의감에 투철한 황국장이 예곤의 살인을 사주하는 것-범죄를 용서치 않는 황국장 자신이 일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원래의 황국장이라면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은 왠지 석연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그리고 <무간도>에서 유건명이 황국장의 미행을 지시하는 것 또한 의도가 너무 번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윗선의 비호를 받아 넘어간다는 설정 또한 그 전개에 있어 다소 무리수였다는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상사가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릴 정도로 유건명이 썩 마음에 들었나보다라고 여길 수 밖에 없게 되는 빈약한 근거의 암시는 짜맞추는 타협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니던가.
로망의 과도한 차용인가 전설의 완성인가 - <무간도 III - 종극무간>
뚜렷한 전제로 시작하는 <무간도>나 내러티브의 전달적 성격을 띠는 <혼돈의 시대>에 비해 <종극무간>은 플래쉬백의 빠른 전환을 활용, 또 하나의 무간지옥의 고통을 전편과 조합된 퍼즐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진영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화는 은근슬쩍 양금영(여명)이라는 뉴페이스를 등장시킨다. 양금영은 <종극무간>이 의도하는 퍼즐의 축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의도적으로 양금영을 하나의 객체화시킨다. 유건명의 시선에 놓인 양금영을 집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영화 전체의 퍼즐적 성격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종극무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추리게임에 동참하게끔 만든다. ‘왜?’라는 질문이 나오도록 상황의 5할만 줄창 보여줌으로써 숨겨진 5할을 추측하도록 유도한다. <무간도>의 명쾌한 전개와는 다소 상반되게 <종극무간>은 트릭의 연속적 배치를 보여준다.
때문에 <종극무간>은 <무간도>의 시간적 배경의 틈새를 파고들면서 <혼돈의 시대>와는 다른 모양새로 전편에의 계승점을 탐색한다. 그래서 <종극무간>은 앞선 두 편과는 다른 정체성을 획득한다. <종극무간>의 템포는 완만하고 지속적이다가 말미에 가서 급격히 고조된다. 트릭의 묘사에 치중했던 관계로 그 초반부는 다분히 나열적이다. <종극무간>의 관건은 그 정체성이 전편에 버금가는 완성도와 설득력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결론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나름의 로망을 창조해내는 데는 성공하긴 하였으나 전편들이 범했던 오류에서 <종극무간> 또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제의 포인트를 찾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군더더기를 남겨놓은 전편들의 습성은 <종극무간>에서도 반복된다. 그리고 트릭의 실체가 밝혀지는 대목에서는 다분히 감정적 포인트를 남발한다. 그렇기에 전반부 종반부의 균형감이 다소 반감된다. 기본적 연관성을 획득하기는 하나 앞과 뒤가 각자 상반된 극점-전반부는 트릭의 나열로 인한 설명의 배재를 지향하는 반면 후반부는 전반에 몰아쳤던 트릭을 설명하느라 분주하다-에 치우친 나머지 과잉이라는 잉여적 요소를 생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성공작이라고 한 배후에는 <종극무간>의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전반의 트릭들이 어느 정도 말미의 설명을 납득시키는 데 기여함으로써 확인되는 치밀성이 자리한다. 의도적으로 객체화시켰던 양금영을 주체로 돌려놓음으로써 영화는 숨겨진 나머지를 보여준다. 그 효과는 완전하진 않지만 <종극무간>만의 로망을 획득하는 데는 어느 정도 부합한다. 전편의 틈새라는 절대적 시간에의 제약을 세밀한 코드의 배치와 전편에의 공유라는 경계를 오고감으로써 극복하고자 한 <종극무간>은 <혼돈의 시대>와는 또 다른 아슬아슬한 계승점을 남겨놓는다.
에필로그
<반지의 제왕>과 <매트릭스>가 3부작으로 손을 털었듯 <무간도>시리즈 또한 이제 그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무간지옥을 헤매던 그들은 갔으나 그들이 남긴 여운은 자못 강렬했다. 그것이 비록 뻔한 탄식이요 비장미의 재탕이라 할지라도 <무간도>는 나름의 로망을 엮어낸 작품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났다 여겼던 <영웅본색>시리즈가 남긴 대책 없는 감상의 싱크로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 유효함을 만끽케 하는 만족감은 그들의 비약적인 면면을 모른 척 용인되게 하는 것일지도. 알면서도 동화될 수 밖에 없는 <무간도>시리즈의 전혀 쿨하지 못한(?) 로망이 짐짓 기꺼운 이유의 근원을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군더더기의 책잡기일런지도 모른다. 단지 보통사람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던 영인과 건명처럼 <무간도>시리즈 또한 그저 인상적이고 멋있는 영화이고 싶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