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三姓穴] :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二徒洞)에 있는 신화유적.

지정번호 : 사적 제134호
지정연도 : 1964년 6월 10일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이도동 1313 외
면적 : 2만 9647㎡
분류 : 사묘, 제단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씨의 3시조 격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梁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각각 솟아났다는 신화가 전하는 유적으로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제주시 한 가운데에 있는 제주칼호텔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 송림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세 개의 구멍이 각각 수m의 간격을 두고 품자(品字) 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깊이가 바다와 통한다는 위쪽 구멍은 둘레가 6자이고 아래의 두 구멍은 각기 3자이다.

3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나무궤짝 안에서 나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하고, 세 공주가 가지고 온 오곡(五穀)의 씨앗, 송아지, 망아지를 가지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제주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삼성혈이 성역화된 것은 1526년(중종 21)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혈비(穴碑)를 세우고 돌로 280여 자[尺]의 담을 쌓아 고·양·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1698년(숙종 24) 혈 동쪽에 위패를 모시는 삼을나묘(三乙那廟:지금의 三聖殿)를, 1827년(순조 27)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奠祀廳)을, 1849년(헌종 15) 숭보당(崇報堂)을 세웠다. 그밖에 석비(石碑)가 부근에 있다.

제례는 고·양·부 3성의 후손들이 매년 양력 4월 10일에 춘제(春祭), 10월 10일에 추제(秋祭)를 삼성전에서 지내는데 헌관은 3성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12월 10일에는 제주도민이 건시제(乾始祭)로 혈단(穴壇)에서 지내는데 초헌관은 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기관장이나 유지 중에서 선임한다.

이 구멍 속에는 빗물이나 눈이 고이지 않는다고 하며, 주위에 수령 500여 년 이상의 노송들과 녹나무·조록나무 등 수십 종의 고목이 울창하게 서 있는데 나무들이 거의 이 구멍을 향하여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제주 고유의 건축물과 제사 모습 등이 남아 있는 유적지이며, 오랜 역사와 끊이지 않는 전통문화를 지닌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는 성소(聖所)이다. 보호면적은 2만 9647㎡이다.

관련유적으로 벽랑국의 세 공주가 타고 온 나무상자가 발견된 해안 황루알, 3신인이 세 공주와 혼인한 혼인지(婚姻池:제주기념물 17), 이들이 혼인한 뒤 영역을 가리기 위하여 화살을 쏘았다는 삼사석(三射石:제주기념물 4)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김녕 미로공원을 떠나 제주 비행장으로 가다보니 시간이 좀 남더군요.
그래서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관광지로 삼성혈을 선택했습니다.
그리 넓지도 않고 남은 시간에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삼성혈 입구입니다.
왼쪽이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사진에 보이는 정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삼성혈에 들어서면 마치 작은 식물원에 온 느낌입니다.
주변이 온통 고목들로 가득하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아주 서늘합니다.
나무마다 표식이 붙어있어 어떤 나무인지를 알려주더군요.

삼성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안내인이 삼성혈 전시관으로 가라고 합니다.
정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인데요.
전시관 앞으로 가면 이쁜 언니가 나와서 다시 오른쪽의 시청각 실로 들어가라고 하지요.
시청각실에서는 탐라개국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영상화하여 틀어줍니다.
'삼성혈의 신화'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15분 정도 보고 나면
자유롭게 삼성혈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풀어줍니다(?)^^

삼성혈 전시관에서 나오자 마자 제일 먼저 삼성혈을 보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애들이 화장실이 급하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지만요.
삼성혈 앞도 고목들로 가득합니다. 길 자체가 주는 여운도 만만치 않더군요.

자~! 삼성혈입니다.
삼성혈 신화는 아무래도 홈페이지에 있는 것을 발췌하는 것이 좋겠죠.
아래 글을 참조하세요^^
출처는 삼성혈 홈페이지 입니다.(
http://www.samsunghyeol.or.kr/mythical.html)


三姓穴 神話 (삼성혈의 신화)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을 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이 湧出(용출)①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이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②를 입고 姿色(자색)③이 출중하고 稟質(품질)④이 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⑤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⑥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⑦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臣(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⑧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⑨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은 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延婚浦(연혼포)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婚姻池(혼인지)⑩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神房窟(신방굴)⑪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 활 쏘은 지역을 射矢長兀岳(사시장올악)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三射石(삼사석)이라 하는데 조선조 영조 11년(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혈에 처음 설단하여 치제한 때에는 서기 1526년(중종21) 이수동목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제주목사가 홍문과 표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였으며 특히 유교국시의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으로 더욱 신성시하였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三姓祠”(삼성사)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王(왕)에 대한 예우로써 國祭(국제)⑫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제향은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봉향하고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하여 혈단에서 드리고 있는데 모든 제관들은 왕에 대한 예우로써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3일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그리고 이 건시대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로 모시다가 현재는 제주도민제로 봉행하고 있으며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 종헌관은 덕망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인류 역사의 변천과 국가 형성 과정을 보면 통치 지역이나 권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연속인 것이 상례처럼 보이지만 三神人이 세공주를 맞이하여 아무런 다툼이 없이 배필을 정한 것이나 생활의 터전을 활을 쏘아 정한 것이나 분할지역을 정한 후에는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영토전쟁이 없었던 것은 오늘날 제주인의 평화 존중의 정신이며 수눌음⑬ 과 조냥 ⑭정신 및 자립과 화합정신의 기틀이요, 이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부를 창조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아니한 강인한 개척의 정신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주 : ① (샘물이 솟아나는) 솟아나옴 ② 푸른옷 ③ 예쁜여자의 얼굴, 자세와 안색 ④ 품성 ⑤ 정돈하여 가지런함. ⑥ 동해 전설(이상ㆍ상상)의 나라 ⑦ 하늘에 있는 궁궐의 누각 ⑧ 짝. 남편과 아내, 배필 ⑨ 나라를 일으킴 ⑩ 혼인한 연못 ⑪ 신인이 방으로 사용했던 굴 ⑫ 나라에서 주관하는 제사 ⑬ 힘드는 일을 이웃간에 서로 거들어 가며 함. 품앗이 ⑭ 물건을 아껴서 낭비하지 않음. 절약

삼성혈 앞의 고목입니다.
나무가 아주 멋지게 자라고 있죠.
설화대로 삼성혈을 향해 고개를 숙이도 있더군요.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삼성혈입니다.

삼성혈의 전사청(典祀廳)입니다.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집으로서
조선조 순조 27년(1872년) 세워진 후 몇차례 이건(移建) 중수(重修)하였고
2000년 9월에 중건(重建)되었다는군요.


전사청과 숭보당 앞은 붉은 색 흙이 깔려있어 아주 색다릅니다.
민재도 붉은 흙이 신기한지 한참을 앉아서 보더군요.

삼성혈 숭보당(崇報堂)입니다.
조선조 헌종 15년(1849년)에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재사(齋舍)로서
몇차례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군요.


삼성전(三聖殿)앞입니다.
삼성혈과 마찬가지로 안에까지 들어갈수는 없구요.
삼성문이라고 불리우는 문 앞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4300여년전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을나(三乙那)의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된 묘사(廟祠)로
신라에 입조(入朝)했던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삼고씨(三高氏)가 우측에 배향되고 있고
조선조 숙종 24년(1698년)에 건립한 후 수차 중수(重修)하였다는군요.

제가 갔을떄는 왠 현지 어르신이 열심히 기도를 드리더군요.
무슨 기도를 하시는지 괜히 방해가 될까봐 숨소리도 조심하게 되더군요.
매년 제례를 지내는 곳도 이곳이라고 합니다.

삼성혈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인 수직사(守直舍)입니다.


민경이와 엄마도 붉은 흙이 좋은가 봅니다.
한참을 그 앞에서 거닐면서 산책을 하더군요.

삼성혈 정문을 빠져나가기 전!
짧고 굵은 투어는 마치고 드디어 이제 집으로 갑니다.
삼성혈도 예상치 않았던 관광지로는 꽤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의 여행은 막을 내립니다.
이젠 무사히 서울로 가는 일만 남았군요.
저희 가족만이 떠난 첫 여행이여서 인지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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