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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마지막 남은 한 권을 읽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버렸군요. 늘 끼고 다니기는 했지만 왠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고생스럽기도 했습니다. 2권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릴때 굉장히 쉽게 읽어낼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말이죠 -_-;;;

애니웨이. 누차 말씀드렸던 것 처럼 - 이전 포스트들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1, #2 - 마지막 3권은 원저자인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 중 『클라우디우스, 신이 되다(Claudius the God)』의 후반부입니다. 전작인 『나, 클라이디우스(I, Claudius)』가 처절한 약자였던 클라이디우스가 어떻게 아우구수투수 -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3명의 황제 시대를 살아남아 원치도 않았던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를 과정을 그려냈다면, 2부는 황제에 올라서도 공화정으로 복귀를 꿈꾸었던 클라우디우스가 아내인 메살리나의 엄청난 음행에 충격을 받은 후 그의 이상을 포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책이 잘 읽어지지 않았던 것 같네요.

로마에 대한 많은 서사물 중 황제 자신이 일인칭 화자가 되어 끌고나가는 소설은 고어 비달의 『율리아누스』와 이 작품 단 2개 뿐이라는군요. 더군다나 이 작품은 미국의 저명한 시사지인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에도 이름을 올린 명작이기도 합니다만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만큼의 감흥을 안겨주지는 못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실망하겠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황제가 되어 걸어왔던 힘든 길을 결국 마누라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절망하고 칼리굴라에 못지않은 네로라는 폭군과 그가 증오하면서도 결국 이해했던 할머니 리비아와 아주 흡사한 아그리피닐라라는 네번째 황후를 로마에 안겨주고 죽음을 맞이하죠;;;

이제는 이 앞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의미있었던 부분들을 옮겨봅니다^^

나는 여전히 황제였고 개인적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아우구스투스도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마음만은 참으로 진지했으며, 심지어 티베리우스조차 퇴임을 말할 때만은 진심이었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렇게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당화했다. 그렇다. 일개 시민의 입장에서 원칙적 공화주의자가 되어 내게 불평하는 건 쉬운 일이다.

"평화적 시기를 골라 자리에서 물러나고 원로원에 정권을 넘기면 간단히 되는 건 아니야?"

그 사람 자신이 황제가 되어본다면 비로서 그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평화적 시기'란 있을 수 없다. 세상에는 언제나 분쟁의 요소들이 있다. "6개월 후면, 1년 후면"하고 진지하게 말하지만, 6개월이 가고 1년이 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분쟁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또 생겨나 자리를 대체한다. 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남긴 혼란을 청소하고 원로원이 자존을 되찾게 되면 즉시 정권을 넘길 생각이었다. 자존없이 자유는 없다. 그래서 원로원을 책임 있는 합법적 동반자, 입법의 요체로 대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원로원을 존경할 수가 없었다. 최고의 적격자들을 의원으로 채워 넣었지만 황제의 기분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전통은 도저히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내 선의를 의심하면서 내가 솔직하고 상냥하게 대하면 입을 가리고 비열하게 숙덕거렸다. 그러다가 내가 가끔 분통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마치 마음씨 좋은 선생님의 관용의 한계를 시험하다 경을 치르는 못된 학동들처럼 벌벌 떨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유산되어 버린 혁명의 지도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난 후 심히 부끄러웠다. 그러나 내가 달리 무슨 일을 해야 했단 말인가?

나는 골똘이 생각에 잠겼다. 플라톤이 말하길, 누구든 통치자가 되려는 사람이 내세우는 이유는 자기 아닌 열등한 인간이 통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반대인데,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자들(비록 근면함에서 내가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갈바나 가비니우스 등이 황제가 될 것이고 그러면 제국은 더욱 강력해져서 공화정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평화의 시기는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일에 매달려야 했다. - 77~79P
이 단락은 클라우디우스가 그에 대한 반란을 진압한 후에 남긴 독백입니다. 그가 얼마나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희망했는지를 알수 있지요. 그가 남긴 이 독백을 보면 지금의 시대와 별 다를바 없는 그때의 모습이 머리속에 어렴풋이 형상화되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둘도 없는 궤변인듯 보이면서도 평화로운 시기는 없다는 그의 말과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은 시대와 관계없이 통용되는 말인듯 싶네요^^

카락타쿠스는 로마로 끌려왔고 나는 그가 도착하는 날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수도의 시민들은 모두들 그를 보고자 거리로 달려나왔다 - 중 략 -

"카이사르여. 지금 나는 당신에게 목숨을 맡긴 몸으로 이렇게 사슬에 묶여있소. 나는 자그만치 7년간 로마군과 싸웠지요. 만약 카르티만두아 여왕이 자기의 손님을 이렇게 대접할 줄 내가 눈치만 챘더라도 한 7년은 더 싸울 수 있었을 거요. 브리타니아에서는 누구든 남의 집에 머물게 되면 집주인이 빵과 소금과 와인을 내준다오. 그것은 손님의 생명을 주인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하겠다는 언약이오. 내 아버지 킴벨린 왕께서는 궁전에 피난 온 사람에게 소금을 주었고, 그가 스스로 우리 선조의 살인범이라고 밝히는데도 '당신은 내 손님이오. 내가 어찌 당신을 해치겠소?'라고 말했지요. 카르티만두아 여왕은 브리간테스족의 여왕이 아니라 당신의 동맹자로서 나를 이렇게 묶어 당신에게 충성의 표시로 여기 보냈소.

내가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이것이오. 내 동생 토고둠누스가 당신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전에 내가 그를 막았어야 했소. 그 편지는 내용의 무례함을 떠나서 바보 같은 짓이었지요. 우리는 젊은 혈기와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소문만 믿고 로마군의 힘과 당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거요. 내가 가문과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하지 않고 겸손했더라면, 나는 아마 이 도시의 포로가 아니라 귀빈으로 초청받았을텐데 말이오. 그랬다면 저 아우구스투스 신이 자신의 동맹자이자 브리타니아 부족들의 대군조로 내 아버지 킴벨린을 인정했듯이 당신도 나를 따뜻이 환대했겠지요.

내가 싸운 이유는 당신이 내 왕국과 동포 부족들의 왕국을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오. 나는 그 전쟁에 대해서는 사과할 것이 없소. 나는 병사의 무기와 전차와 돈이 있었소. 내가 왜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포기하겠소? 로마군은 당신의 지배를 세상 끝까지 넓혀가려고 하겠지만 당연히 사람들은 그 지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아요. 당신은 먼저 당신이 통치자의 권리가 있음을 그 무엇보다 힘으로 보여야 하지요. 카이사르, 긴 전쟁이었소. 당신의 군대는 내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고 나는 많은 병사를 잃었소. 이제 나는 포로이고 승자는 당신이오. 내가 메드웨이 전투에서 아울루스 장군과 처음 만나자마자 항복했다면 나는 별 볼일 없는 적이었을테고 아울루스 장군도 당신의 친정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요. 그랬다면 당신도 멋진 개선식을 하지 못했을 테지요. 그러니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적에게 예우를 갖춰주시오. 나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당신의 고귀한 관용은 이제 당신 나라인 브라타니아에서도 길이 기억될 것이오. 로마가 패자의 용기를 인정한다면, 브리타니아도 승리자의 관용을 높이 평가한다오." - 279~280P
클라이디우스가 벌였던 유일한 정복전쟁인 브리타니아 전쟁에서 패한 카락타구스. 그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였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연설이죠. 특히 마지막 문단을 더욱 그러하네요. 정복자인 로마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전쟁과 지키기 위한 사람이 전쟁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르겠죠. 피정복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가진것을 지키려할 수 밖에 없지요. 이 연설이후 카락타쿠스는 어찌되었을까요? 당연히 석방되고 클라우디우스의 승전 연회에 참석하죠. 그 연회에서 카락타쿠스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깁니다. 후대까지 유명해진 말이죠.

"페하, 참으로 이애할 수가 없군요. 대리석으로 깎아지른 듯한 집들과, 온 세상의 물산이 그득 넘치는 상점들과, 우리 드루이드 사제들이 꿈에 죽은 자의 왕국에 가서 봤다던 그런 신전들이 저렇게 즐비한 이 위대한 도시를 다스리는 분께서, 초라한 오두막집만 늘어선 불쌍한 저의 나라를 왜 그렇게 탐내셨습니까?"

그렇지요. 왜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죠^^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할수도 있지만 말이죠^^

백년제 또는 '속죄의 축제'는 새로운 역사의 한 순환을 기념하여 열린다 - 중 략 -

각각의 순환 주기에는 모두 확연한 개성을 갖고 있다. 그 개성은 주기가 시작되는 해에 일어난 사건들로 정해지는 것 같다. 직전의 백여 년은 그 첫해에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고, 그리스의 미트리다테스 대왕이 죽었으며, 폼페이우스가 페니키아인들을 대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카탈리나거 시민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했고, 카이사르가 대사제에 올랐다. 각각의 사건이 왜 중요한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하여 그 100여년간 우리 제국은 광대하게 뻗어 나갔으며, 대중의 자유는 억압당했고, 황제들은 모두 신의 대변인을 자처하지 않았는가? 나의 의도는 이랬다. 지난번 주기에 벌어졌던 죄악을 속죄하고 거룩한 희생제로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바로 그해에 나는 나의 개혁을 완수하려고 했다. 이제 날로 번창하며 능률적인 로마의 정부를 다시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것은 나의 숙원이었다.

나는 세부적인 계획까지 준비했다. 매년 새로이 선출되는 집정관 휘하의 원로원의 통치란 확실히 불합리했다. 1년 임기는 너무 짧았다. 군대는 그들의 총사령관이 자주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 계획은 간단했다. 내가 일개 시민으로 말년을 누리는 데 충분한 만큼을 제외한 황실 제정 전부를 국가에 헌납하고, 이집트를 포함한 황제 관할 속주를 원로원에 돌려주며, 5년에 한번씩 정부를 재편하자는 법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 중 략 -

나는 내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훨씬 가벼웠다. 내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내가 결코 폭군이 아니었으며 몇 차례 죄인을 즉결 처형해 버린 일도 내 본뜻은 아니었음을 사람들도 인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저지른 크고 작은 잘못들도 모두 이 위대한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이해할 테고, 나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지우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은 언젠가 물러나고 공화정을 복구시키겠다고 늘 말했지만 리비아가 있어 그러지 못했지. 티베리우스도 늘 그런 말을 했지만, 자신을 미워한 누군가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어. 하지만 나는 정말로 물러날 것이다. 내 계획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도 떳떳하고, 메살리나는 리바아가 아니니까.' - 283~285P
수 많은 암살시도와 혹평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는 여전히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자신의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려 한 데에는 세번째 황후이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메살리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그는 메살리나가 자신의 할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뒤에서 실질적으로 초기 제정의 모습을 만든 리비아가 아니라고 믿었지만 실제 메살리나는 리비아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욕적이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말도 안되는 짓들을 하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이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죠;;; 이내 그녀의 본색에 대해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로마 제국안에서 자신만이 그녀에게 속아왔음을 알게되고 정신을 잃을정도로 큰 충격에 빠지고 말지요...

메살리나를 처형시킨 후 클라우디우스는 공화정으로의 회귀하려는 꿈을 접어버립니다. 최소한 자신이 황제에 있는 동안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할머니 리비아만큼이나 사악한 여자인 아그리피닐라 - 클라우디우스 자신의 조카죠 - 를 네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그녀에게 많은 권한을 넘겨줍니다. 곧 이어서는 친아들인 브리탄니쿠스보다 아그리피닐라의 아들인 네로에게 더 많은 지위를 안겨줍니다. 이윽고 네로를 입양하기까지하죠. 그의 일련의 선택안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예언상 자신의 이후에는 네로가 황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아들인 브리탄니쿠스는 브리타니아로 보내 먼 훗날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의 마지막 계획마저 아들인 브리탄티쿠스가 거절당했고 클라우디우스는 뒤늦게 네로와 동등한 권력을 아들에게 주려하지만 이를 눈치챈 아그리피닐라에게 독살을 당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대부분 버섯에 넣은 독에 의해 죽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의 뒤를 이어 칼리굴라보다 더 사악하기로 유명한 네로가 황제가 되죠. 그 네로마저 죽으면서 카이사르가 터를 닦고 아우구스투스가 그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아예 간판까지 달았던 제정에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사라져버립니다. 이들은 1천년에 가까운 로마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단절을 수행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클라우디우스가 지닌 '공화정'의 꿈을 이루어지지 않은채 사라졌지만 이미 그 꿈은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렸고 지배받는 사람들조차 돌아가길 잊어버린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별 다를 바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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