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의 최신작. 3세기에서 4세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시기는 '팍스 로마나'는 그땐 좋았지라며 회상을 할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이며, 더 이상 로마가 로마답지 않게 되는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다. '사두정치'를 착안하고 실행하면서 마지막까지 로마 제국을 지켜보려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노력도 허사가 되어버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중세를 향하는 문을 연 시기이기도 하다.
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비록 나쁜 결과를 낳은 사례라 해도 그것이 시작되었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다는 말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중 4권과 5권에 걸쳐 다루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 오래 기억이 남을 것 같은 책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역사상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제'중 한명으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 체제의 혼란으로 시작된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기독교를 공인하며,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고, 제정을 절대 군주정으로 바꾸며 중세로 가는 문을 연 황제다.
"로마인은 세번 세계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군단으로, 다음에는 법률로, 마지막에는 기독교로..." 군단으로 세계를 지배한 것이 율리유스 카이사르라면, 법률로서 군대를 지배한 것은 로마인 그 자체였고, 기독교로 세계를 지배한 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였다. 로마인의 군단은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에 그치지만 법률은 오늘까지 그 기본 사상을 이어오고 있고, 기독교를 현재 가장 큰 종교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기독교도도 아닌 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관심을 간 이유는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이유가 무엇일까였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본문 발췌 요약글을 보시기 바라며...여기서는 간략하게(?) 정리해볼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기독교도는 로마 전체의 인구 중 5% 미만이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5%미만의 기독교도들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철저한 탄압으로 확장을 억제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주교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며 장려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철저하게 탄압한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가까운 이웃보다는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동료로 생각하는 정신때문이었다. 제국의 방위선을 지켜야하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야만족일지라도 기독교도라면 '같은 형제'라고 생각하는 제국 내 기독교도들이 제국 방위에 저해물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책에서 180도 전환하여 기독교를 제국내에 존재하는 종교로 인정하고 기독교도들의 믿음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기독교도는 위에서도 밝혔지만 전체 국민의 5%도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닌 단지 5%미만의 사람들을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이 부분에 대해 철저하게 의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낸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것이였다. 그것은 바로 '통치의 도구', '지배의 도구'로서의 기독교였다. 3세기의 로마는 더이상 '팍스 로마나'시대가 아니다. 백여년 가까이 계속된 외침에 국경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황제들은 끝없는 '리콜'요구에 시달리며 단명하기 일쑤였다. 황제가 암살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통치할 권리를 시민과 원로원이 주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황제는 그 권리를 빼앗아야 했고 황제에게서 통치의 권위를 빼앗는 방법은 육신을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핵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통치의 권위'를 인간이 아닌 '신'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그것도 과거의 로마의 '신들'이 아닌 '유일신'에게로부터...당시 이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도에 적합한 종교를 기독교밖에 없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도였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서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분명히 새로운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선택했고, 본인은 절대 기독교도라고 하지도 않았고 과거의 로마 종교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독교 주교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기독교도들이 기도를 드리는 일요일을 기독교들에 한해 휴일이라 규정하면서 기독교의 확대를 방치(?)하였다.
황제는 더 이상 인간의 뜻이 아닌 '신의 뜻'에 따라 통치와 지배의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세습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졌고, 이전까지 로마 황제를 괴롭히던 견제기관들이 모두 힘을 잃어버리고, 절대 군주정의 시대가 밝아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큰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콘스탄티누스의 방법을 동 시대의 로마인들은 몰랐던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를 읽으면서 몇일전 참여했던 웹2.0 컨퍼런스에서 한 강사가 말했던 성공원칙 중 하나가 떠올랐다. "참여하지 않은 듯 참여하게 하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변하게 만든 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탁월한 능력같다.
>본문에서 발췌 내용(콘스탄티누스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만 보셔요. 스크롤 압박이 좀;;;)
◆ 너무 당연한 생각이라서 특기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 때에는 가장 본원적인 명제로 돌아가서 방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최우선 사항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당면 과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목적을 놓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13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 中
◆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왜 이렇게까지 기독교회 진흥에 열심이었을까?
기독교 쪽에서는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설파하는 참된 가르침에 눈을 떴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법을 흉내내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반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진흥하려고 애쓴 4세기 초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눈을 뜬 사람이 제국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5% 안팎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내놓은 추정치다. 20명 가운데 한 명이 기독교도였다는 것은 대도시에 국한된 수치이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범위를 넗히면 이 비율은 뚝 떨어진다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게다가 그 대도시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같은 제국 동방의 도시뿐이고, 같은 대도시라도 기독교 쪽이 이교의 메카로 생각한 로마에서는 5%를 기록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 중략 -
3세기부터 4세기에 걸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설파하는 참된 가르침에 눈을 뜬 사람'이 로마 제국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기독교도가 '절대 소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절대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도에 대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왜 그렇게 철저한 탄압을 강행한 것일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흥시키겠다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결심한 것은 로마 제국의 방위였다. 구체적으로 제국의 방위선을 돌파한 야만족이 제국 안으로 깊숙이 칩입하여 약탈과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는 상태에서 제국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제위를 안정시켜 지도자 계층이 일치 협력하는 체제를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국에 사는 일반인까지도 자기네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단결해야 한다. 야만족은 우리의 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 안전보장의 '주춧돌'이다.
그런데 일신교됴. 그중에서도 특히 이민족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펴는 데 열심이었던 기독교도는 자기와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보다 자기와 같은 신을 밑는 사람을 더 중여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바꿔 말하면, 함께 자라고 가까이에 사는 소꼽동무보다 일시적인 방문객이라도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도면 로마 제국에 사는 기독교도에게는 제국 안에 사는 동포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공유하는 야만족이 더 가까운 동포가 된다. 동포에는 같은 겨레붙이라는 뜻 이외에 형제자매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에서 형제나 자매는 피를 나누지 않아도 '가르침'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우려한 것은 기독교됴의 실제 수효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독교가 보급되어 제국의 방위선이 융해되어버리는 것을 더 우려했다. '적' 확실하지 않게 되면 누구를 막아야 할지 불명확해지고, 따라서 '방위'도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수정 시대 황제들의 기독교관을 이어받고 있었다. 이 사람을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보는 연구자도 적지 않은데. 그 견해는 바로 이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중략-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흥에 열심히 몰두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기독교 세력이 제국 안에서 '절대 소수'인 상태가 바뀐 것은 아니다. 바뀌기는커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철저한 탄압을 받은 뒤여서 더욱 소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콘스탄티누스는 선임자의 정책을 180도 전환했다. 무엇 때문일까?
-중략-
지도자나 지배자의 임무는 자신의 지도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욕구와 수요를 받아들여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깊이 생각지도 않고 그대로 덥석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런 종류의 '임무'는 온갖 정치가들의 좌우명이 되어 있다. 물론 이것도 그들의 임무이기는 하다. 하지만 임무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수요에는 이미 존재하는 수요도 있자만, 환기시켜야만 비로서 생겨나는 수요도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가 통치란 통치를 받는 쪽의 수요를 받아들여 현실화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지도자였다면, 5%밖에 안되는 지지자를 위해 이익을 유도할 리는 없다. 콘스탄티누스도 환기시켜야만 비로서 생겨나는 수요도 있다고 믿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왜 그렇게까지 수요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소수'를 '다수'로 만들려고 그렇게 애쓴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피해서 지나갈 수 있는, 즉 경시해도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까지 기독교를 편들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이었을까?
''인스트루멘툼 레그니'(Instrumentum regni), 요켠대 '지배의 도구'
로마인은 왕정·공화정·제정으로 정치체제를 바꾸면서도 세습에 관해서는 시종일관 석연치 않은 느낌을 품어온 민족이다. 바꿔 말하면 세습을 어쩐지 수상쩍게 생각한다. 왕정도 선거제였고, 공화정 시대에는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하는 집정관을 시민집회에서 선거로 결정했다. 제정으로 넘어온 뒤에도 공식 주권자는 황제가 아니라 로마 시민과 로마 원로원이었다. 이 주권자들한테서 권력 행사를 위임받은 사람이 황제였다. 따라서 권력 행사를 맡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 황제는 살해되었다. 1년 임기의 집정관과 달리 황제의 임기는 종신이니까, 그 황제를 '리콜'하고 싶으면 육신을 말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세기에 로마 제국이 위기에 직면한 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황제에 대한 '리콜'이 잇따라 일어나 정국 불안정이 계속된 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창안하여 실시한 것이 '사두정치'체제다. 하지만 이 시스템도 단명으로 끝났다. 그것을 단명으로 끝나게 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사두정치'로는 정국 불안정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본 게 분명하다. 또한 로마 제국을 혼자 통치한 원수정 시대의 황제들처럼 자기도 혼자 통치하고 싶다는 야망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을 혼자 통치하고 싶으면, 장기간에 걸쳐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새로운 체제를 고안해낼 필요가 있다. '사두정치'형 체제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고, '원수정' 체제는 암살로 황제를 '리콜'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도 정국 안정이 제국 유지의 열쇠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황제는 제국의 국경인 방위선에 군사력을 배치하지 않고 그가 직접 이끄는 병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비판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정국 안정을을 위해 애쓴 것이 제국의 이익보다 자기 가문의 존속을 중시했기 때문이라 해도, 최초의 중세인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권력 행사를 맡기는 것이 인간인 이상 권력자에게서 권력을 빼앗을 권리도 인간에게 있다. 권력자를 리콜할 이 권리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있다면 어떨가?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은 이 역할을 맡기에 적절치 않았다. 다신교의 신은 인간을 보호하고 도와주눈 신들이지 인간에게 어떻게 살라고 명령하는 신은 아니였기 때문이다. 다신교와 일신교는 신의 성격부터 다르다. 콘스탄티누스의 필요을 충족시키는 신은 일신교의 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4세기 당시 로마 제국에서 이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일신교는 기독교뿐이었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종교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기독교는 민족의 차이를 초월하는 것을 포교의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기독교 세력이 미미했던 그 시절보다 무려 270년이나 전에 기독교를 유대인의 민족 종교에서 벗어나 세계 종교로 나아가게 한 성 바울은 이미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의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믿는 종교에서는 신 이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는 신의 지시가 있었기에 권위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이런 현세의 권위 위에 군림하고 지고의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중략-
현실 세계, 즉 속세를 통치하거나 지배할 권리를 군주에게 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사고방식의 유효성을 깨달았으니, 콘스탄티누스의 정치 감각은 경탄할 만큼 뛰어나다. 권력을 위임하던, 반대로 권력을 리콜하던, 그것을 결정할 권리는 '가지'한 인간이 아니라 '불가지'한 유일신에게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은 실재로는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의 뜻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진 누군가가 그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뜻이 성직자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일상적으로 신자와 접촉하는 사제나 고독한 환경에서 신앙을 추구하는 수도사보다는 교리 해석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공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있는 주교가 더 권위있는 전달 코스다. 요컨대 세속 군주에게 통치권을 주느냐 아니냐에 관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제도상으로는 바로 주교였다. 그렇다면 주교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신의 뜻'도 '네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을 알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주교들을 회유할 수 있느냐. 문제는 그 점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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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책을 썼을까? 조직의 우두머리는 반드시 자기가 정상에 앉아있는 조직의 확립과 존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주교에게 그것은 자기가 관할하는 교구에서 벌어지는 각종 종교활동을 비롯하여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사람과 돈을 확보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보장하고 더 늘려주면 되었다.
-중략-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이 공표된지 11년이 지난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내정에서 패하고 항복한 리키니우스 쪽 장병들은 승자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여. 당신에게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신들'이라면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말한다.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도 병사들에게는 '신들'이 더 친숙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병사들에게는 친기독교적 태도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황제로서의 권위는 군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병의 지지를 줄이는 행동은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는 치명적이 될 터였다. 다만 사소한 일은 실행했다. 기독교도 병사는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이유로 일요일에 쉬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교도 병사들에게는 일요일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훈련을 시킨 것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종교로서 공인했을 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지도 않았고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배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4세기의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많은 종교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단지 일요일에 쉴 수 있다는 하찮은 이유로 개종했다 해도, 정신적 부담은 후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최초의 교회사를 쓴 사람으로 유명한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당시 기독교 개종자들이 대부분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이익 때문에 개종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개개인의 신앙심이 저절로 강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소수'를 '다수'로 만드는 데 터무니없이 긴 세월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 그 가르침이 공인될 때까지만 해도 300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개인이나 직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익'을 개재시켰기 때문에 '소수'는 좀더 단기간에 '다수'가 되어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주교 계급을 회유한 것과 더불어 이것도 인간성의 현실을 냉철하게 통찰한 뒤에 세운 교묘한 전술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경탄스러울 만큼 정치적이고,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뛰어난 정치감각이다.
통치나 지배의 권리를 인간이 아니라 신이 주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역대 로마 황제들을 괴롭힌 것이 단번에 해소되었다.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던 기관이었던 원로원도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렸다. 견제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자에게 권력을 줄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인 시민이 의사를 표시하는 자리였던 원형투기장이나 대경기장도 그후로는 단순한 오락장으로 바뀌었다. 로마인은 제위 세습을 항상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아무리 무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도 그 구실을 찾으려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 "나와 내 아들이 너희를 통치하는 것은 너희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너희가 믿는 신의 뜻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신의 뜻이다!" 한 마디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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