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시골에서보다 도시의 강가 공원에서 시도 떄도 없이 연 날리는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실이 좋아져서 그런지 연은 그전보다 더 멀고 높게 난다. 시골 아이들은 대보름을 앞두고 연을 많이 날렸었다. 대보름날이면 더 풀 실이 없을 만큼 연을 높이 띄우고 날리다가 실을 끊어버렸다. 멀리 멀리로 소망을 싣고 날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세 좋게 높이 떠서 날던 연은 실이 툭 끊긴 순간, 바람에 맞서 저항할 의지를 잃고 비실비실 꼬리를 흔들며 멀리 가물가물 가라앉는다. 기껏 얕은 산 너머나 바다 한가운데 떨어질 뿐이겠지만, 산골이나 바닷가 아이들이 연도, 그 귀하더 실도 날려버리는 행위는 대단한 결단력을 요구하는, 자못 비장한 제의였다. 소망이 간절하였더라도 연의 실을 끊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끊어서 멀리로 날려보내고 난 뒤에는 이듬해 그맘때까지는 연을 새로 만들지 않았다. 소원은 아무 때나 자주 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 아이가 스스로 만들고 크레용칠을 해서 한껏 모양을 낸 연을 날라다가 떨어뜨렸다. 그러나 연의 실이 키 닿는 얕은 나무가지에 걸렸으므로 아이는 끈질기게 차근차근 그 실을 풀어나갔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 아이는 마침내 인내심으로 그 실을 풀어냈다. 높은 가지 끝에 아이의 안타까움처럼 걸린 연은 겨우내 이따금씩 꼬리만 퍼덕이곤 했었다.

"묶은 사람이 풀어야 된다"(結者解之)지만 역사나 영화를 보면 묶은 사람이 풀어줄 때보다는 묶인 사람이 스스로 풀고 탈출하는 경우가 많다. 일을 저지른 사람이 해결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한데, 저지른 사람이 해결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높은 나무 꼭대가에 거꾸로 걸린 연처럼 남아 있어야만 될까? 연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질 수 있겠지만 저질러진 일도 그렇게 될까? 가령 키 높이에 걸렸더라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인내심이 없다든가, 연의 실이 풀리지 않도록 아주 엉켜버렸다면 아이는 실을 끊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블러드 노트처럼. 서양 사람들의 그 매듭은 풀 수도 없고 칼로 잘라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 것도 한 가지 해결 방법이기는 하다.

이젠 아무도 날려버리는 연에 소망을 걸지 않는다. 한강 가에서 보았다. 별로 높지 않은 가지 끝에 걸린 연의 실을 아이의 아버지가 다가서서 냉큼 끊어내는 것을. 요즘 그런 데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주자는 것이었을까?

치명적인 블러드 노트가 아닌데도, 그저 단칼에 싹둑 하는 것이 과연 잘 해결하는 것이기만 할까?

강운구 글·사진 『시간의 빛』 중

P.S.
초등학교때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버린 산에 올라가 연을 날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연을 잘라버리면서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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