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 마티니

from 되새김질/BookS 2006. 12. 2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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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칵테일협회에 등록된 칵테일만 해도 수천 종에 달한다고 들었다. - 중략 -

칵테일 종류는 하늘의 별만큼 많다.
칵테일의 발상지는 미국.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술은 고작 해야 버번 위스키정도였다. 술이라기 보다는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알코올이었고, 목구멍을 넘기기가 하도 역겨워 궁리해낸 것이 칵테일 아니었던가. 출발은 그렇게 궁상맞았지만, 기술도 세월에 여과되어 이제는 세련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칵테일 종류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고 하지만, 일반 주객들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것을 따져보면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그 베스트 텐 가운데 1위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상위권에 드는 것이 마티니다. 알코올 함량 42%의 진에다 포토주를 바탕으로 초근목피의 약미를 가한 20도 가량의 베르무트 약간을 섞어 셰이크 한 다음, 올리브 열매 하나 또는 레몬 껍질 한 가닥을 넣은 것 말이다.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는 아페리티프로, 마티니 한 두 잔을 들지 않는 미국 사람은 금주주의의 맹신자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이 칵테일은 보편적인 술이다.

이 술을 주문할 때 보면, 마시는 사람이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노력하고 가락이 있는 바텐더라면 그것을 주문한 손님에게 이렇게 반문하게 마련이다.

"How do you like it?"

이 질문을 "왜 그것을 좋아하세요?"라고 알아들어 "i like it"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주객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어떻게 해서 마시겠느냐는 질문에, "그냥 보통으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주객이기는 하나 풋내기이므로 바텐더로부터 존경받을 생각일랑 말아야 할 것이다. "Make it dry!"라고 명한 다음, 한참 뜸을 들였다가 엄숙한 목소리로 "엑스트라 드라이!"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바텐더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Yes, Sir!"라고 화답할 것이다.

바텐더도 프로가 왔다는 것을 그 주문 한마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통 아마추어들의 마티니는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이 3 대 1 정도다. 프로의 경지에 접근할수록 5 대 1, 10 대 1, 100 대 1로 변하게 마련이다. '엑스트라 드라이'라고 하면 100 대 1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칵테일이라고 하면 술과 술을, 술과 향료를 혼합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프로들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믹스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술을 약한 것으로 코팅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티니의 경우, 진의 알몸뚱이에다 베르무트의 얇은 옷을 입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기 위해
옷을 말할때 우리는 흔희 여성을 연상한다. 맥시보다는 미니가 더 매력적인 법. 미니보다는 해변의 비키니가 더 볼품 있고, 토플리스가 더 바람직하다. 마티니의 코팅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럴 바에야 베르무트를 한 방울도 섞지 말고 진만 알몸으로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신사의 체면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벌거숭이 마티니를 마실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섬이라는 맨해튼의 어느 바에서 외국인 기자 몇 명과 어울렸을 때의 일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 화제에 올랐다.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옛날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던 스포이트 생각나니?"
"그 스포이트로 베르무트 한 방울을 떨어뜨리니까 마티니 맛이 되더군."

"그것보다는 주사기가 낫지. 가장 가느다란 바늘인 25호 정도면 베르무트 방울을 훨씬 작게 만들 수 있지."

또 한 친구의 이 비법에 다른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내가 향수 뿌리는 분무기 알지? 그걸 빌리는 거야"

이번에는 듣고만 있던 바텐더가 한마디 거들었다.
라스베에거스의 어떤 바에 가면 원자 마티니를 마실 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과학자 중 마티니 애호가가 있어서 네바다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할 대 그 폭탄 속에다 베르무트 한 방울을 주입해두었다는 것이다. 원자탄이 폭발할 때, 그 한 방울이 같이 폭발하면서 대기 중에 퍼진다. 그래서 마티니 만들 때 셰이커 뚜껑을 열고 창밖으로 1초 동안 노출시키면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베르무트의 기가 내려앉는다는 설명이었다.

이름 하여, 그것이 '원자 마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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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작고한 칼럼니스트 수탑 심연섭의 에세이 '건배'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으로 취재현장을 누볐던 전 동양통신의 이사.

술을 그 누구보다 좋아했던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맛본 술의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둔 책이다. (그렇다고 꼭 술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그가 아쉬워했던 부분에 동감이 되어 요즘 마트에 가면 전통술을 하나씩 사서 모으려고 애쓴다.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전통을 가진 술이 일제시대에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생존해있던 1977년까지만 해도 소주 일색이던 우리나라 주류 시장에 근래 전통주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

몇십년씩 묵혀둔 양주나 포도주가 기백만원씩 하면서 사람들의 기를 죽이는 반면 우리는 늘 몇천원짜리 소주를 머나먼 타향에서도 그리워했다. 하지만 소주는 일제시대에 들어온 증류주일뿐...

바로 옆 중국에만 해도 8대 명주(마오타이주<귀주모대주>, 오량액, 분주, 죽엽청주, 양하대곡, 노주특곡, 고정공주, 동주)가 버티고 있는데 4천년 역사니, 민족 문화니 하는 우리나라에는 내세울만한 전통주가 양조는 관이 맡아야 한다는 일제시대의 정책때문에 맥이 끊기고 말았다. 개성·안동의 소주, 해주 방문주, 서울과 철원의 낙주, 경주 법주에다가 동래의 동동주까지....

아직은 전통의 그 맛을 다 찾아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남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명주가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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