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도착한 시간이 우리나라로 치면 3시쯤. 상해 현지 시간으로는 2시더군요. 상해와 우리나라와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패키지로 간 일행이 모두 28명이였는데 20명이 단체로 온 젊은 친구들이라 적당히 괜찮은 조합이였지요. 방해받지도 않고 또 홀로 행동하기도 적절한 정도의 규모^^ 공항을 빠져나와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상해시가지를 가로질러 처음 도착한 곳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였어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가 봐야 할 곳이죠. 청사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건물을 연상하기 마련입니다만, 막상 가보면 허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경>
건너편에 아저씨들 서있는 빨간 벽돌건물이 전부입니다. 무자게 썰렁하죠... 그나마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수교후에 복구작업을 시작했고... 지금도 기부금을 받아 계속 관리하고 복구중이라고 하더군요;;;
<상해 임시정부 앞 벽에 표시된 안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푸서지역에 있습니다. 과거에 그 지역이 프랑스령이였때문에 일본군들이 진입하지 못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허름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보면 2차선 도로가에 위치해있습니다. 만약 혼자 배낭여행을 간다면 미리미리 위치 확인을 잘 해야할듯... 사진처럼 허름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딱 좋거든요^^
<임시정부 관람시간 정보>
제일 위의 사진 왼쪽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임시정부의 입구가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가운데 유리문은 임시정부를 관람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사람 하나 겨우 지날만한 문 2개가 있는데요. 첫번째 문으로 들어가면...30명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방이 나오고 10분 가량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한 비디오 영상물이 방영됩니다.
비디오를 보고 돌아나와 바로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시면 됩니다. 이때 입장권도 내야하구요^^ 문을 들어서면 신발을 뒤짚어 쓸 수 있는 비닐신발을 아주머니가 나눠줍니다. 그걸 신고 1층부터 3층까지 죽 관람하고 되죠^^
<1층 정면에 전시된 태극기>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둘> 왼쪽부터 홍진-김구-이동녕 선생입니다.
전시관 1층에 들어서면, 임시정부 주요 인물들의 얼굴이 왼쪽 벽면에 걸려있고 정면에는 커다란 캐극기가 전시되어있어요. 빛바랜 태극기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를 뭉클함이 있답니다. 그 오래전 이곳에서 고생을 하셨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말도 안 통하는 타지땅에, 그것도 프랑스령까지 쫓겨들어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노력했을 많은 어른들... 같은 상황이 재연되면 과연 나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더군요.
<부엌>
1층 메인 홀을 지나 계단 바로 오른쪽에 있는 부엌입니다. 임시정부 시절 쓰던 물품들을 복원해뒀더군요. 아기자기하고 오늘날로 치면 그냥 가정집의 부엌정도 크기입니다. 넓디넓은 중국 땅덩어리에 우리 임시정부는 너무 아기자기하고 작아요. 남의 나라에 있는 설움이겠죠;;;
<집무실>
<집무실의 책상>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서면 김구선생이 쓰셨던 집무실이 나옵니다. 사람 한명 겨우 누을만한 침대와 좁은 책상. 강한 의지가 없다면 극복이라는 게 쉽지 않을 환경이더군요.
<티 테이블 - 접견실의 티 테이블인듯합니다>
<1층에서 2층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람 2명이 마주치면 서로 몸을 돌려서 비켜가야할 정도로 좁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가면,
이렇게 청사 직원들의 숙소가 나옵니다.
짧은 임시정부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아래 사진처럼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있습니다.
다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내려가면 임시정부의 역사를 사진과 글로 벽면에 전시해둔 곳이 있습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기념품을 파는 곳과 임시정부를 위한 헌금을 할 수 있는 헌금 통이 있어요.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다른거죠.
가이드 말로는 헌금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헌금통은 임시정부 유적지를 위해 쓰이기는 하지만 중국정부로 들어가는 돈이라고 합니다. 임시정부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려면 차라리 기념품을 사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데요.
엄청난 발전속에 있는 도시가 상해이고, 중국의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는 익히 알지만 임시정부는 너무 아담해요. 한 나라의 정부라기엔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죠. 1919년 상해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그나마 식민후기로 가며 일본이 국세가 더 커짐에 따라 상해에서도 밀려나 항주로 이전하고 그 이후에는 거의 매년 내륙쪽으로 쫓기다시피 들어갔더군요--;;;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 3·1운동 직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하여 선포한 임시정부.
구분 : 임시정부 설립연도 : 1919년 4월 13일 소재지 : 중국 상하이 설립목적 : 독립운동 주요활동 : 내정·군사·외교·교육·문화 등의 광복정책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월 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東京義擧]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 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