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빛

from 되새김질/BookS 2006. 8. 15. 19:46

강운구 글·그림 『시간의 빛』

"이 땅에서는 풍경도 빠르게 사라진다. 사람 없어 한갓지고 배어난 비경 같은 것은 이제 없다. 그런 곳은 이미 이 땅에서 다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그런 곳이 있다 하더라도 말 못 한다. 지난날 어리석어, 입 싸게 놀린 탓으로 별난 사람들 몰려들어서 망가진 몇 군데에 무거운 빚을,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있으므로..."

서문 중


오래동안 책장에 꽃혀있던 책을 꺼내들었다.
'시간의 빛'이라는 제목에 강렬함을 느끼며 시선이 꽃히고 무의식중에 책장에 꽃아둔 기억뿐.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저 글·사진이 모두 그의 작품이려니 하는 생각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해 궁금해 검색하니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작가'란다.
그의 사진속에는 자연에 대해 너무 미안해 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에 올라가면 흔하게 보는 '자연보호'라는 간판을 그는 '사람은 자연을 보호할 수 없다'의 준말이라고 해석한다.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보호'하려 하지말고 해꼬지나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파괴하지 말자', '보호하자'라고 말을 돌리는 인간들은 자연앞에서 비겁하고 오만하단다.
근래 라디오에서 자주 듣는 공익 캠페인을 생각나게 한다.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당신에게 자연이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그의 글 한줄한줄에, 사진 한장에 자연에 얼마나 쉽게 그리고 무의식중에 이 땅을 더럽혔던가 하는 따가움이 마음속에서 아프게 한다.



"난초는 나약하지 않다. 준수하고 귀티나지만 잡초보다 더 강인하다. 남쪽의 여기저기 마른 비탈의 숲 가장자리에는 난초가 흔했으며, 이른 봄이면 그 향기가 퍼져나갔다. 흑산도에서는 배 타고 가면서도 풍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을 모두 보기 힘들다. 빼어나게 향기 좋은 풍란과 잎이 아름다운 한란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고, 춘란은 보기 어렵다. 모두 다 그 향기와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뽑혀가 화분에서 얼마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것이 많다.

한때는 서울 광화문 지하도 입구에서 풍란이나 춘란을 가마니로 쌓아놓고 헐값으로 팔기도 했다. 다 저 남쪽의 무인도 같은 곳 절벽에 핀 것들을 쓸어담아다가 여러 사람이 골고루 나눠가진 뒤에 골고루 죽이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험해서 자태 귀하고 향내 좋은 것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향내 같은 것은 서둘러서 버린 것일까? 향내 나는 고귀한 사람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보면 죄다 몰려가서 숨 막히게 한다."

"한때 우리나라 등산가들은 히말라야의 한 산꼭대기에 맨 처음 오르고서도 '정복'이라는 말을 애써 쓰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했다. 여러 등산가들은 누가 물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산은 정복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산을 정복할 수 없지요. 다만 운 좋아 산이 허락해주어서 올랐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하나 거창한 말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산들에 갔었다는 이력을 자랑 삼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산 저 산을 차례로 '정복'해간다. 기껏 꼭대기까지 한번 올라간 것이 정복이다. 이력으로 삼기 위하여 꼭대기나 탐하는 사람들을 서양에서는 '피크 베거'(산정구걸꾼)라고 부른다.
--- 중 략 ---
그보다 도시에는 '피크 베거'가 더 많다.

"사람은 풍경을 바꾸고 그 풍경은 사람들을 달라지게 한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는 식물들보다 '고등'하지만, 그래서 식물들보다 불쌍하다 . --- 중 략 ---

비 많은 기간을 틈타 음지식물들은 성대를 구가한다. 숲 그늘에서는 여러 가지 버섯이 순식간에 피어 씨를 뿌리고 사그라진다. 그런 버섯과 같은 곰팡이류는 숲에 쌓인 낙엽이나 나무등걸 따위를 썩게 하여 완벽하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것은 낙엽이나 줄기를 버린 나무들에게 그것들을 거름으로 되돌려 주는 역할을 한다.

숲을, 자연을 청소하며 제 목숨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것이 곰팡이류이다. 그 많은 낙엽과 쓰러진 나무등걸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떨 것인지는 짐작하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 사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는 사회의 음지에는 독버섯뿐이다. 그것들을 썩게는 하지만, 썩는 범위를 양지 쪽으로까지 넓혀나가기는 하지만, 결코 썩어 없어지게 하지는 못한다. 아마 그것도 인간이 '고등'해서 그런가 보다. 장마철엔 온 도시가, 온 나라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썩기만 하고, 썩어 없어지지는 않는 것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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